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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비슬산 대견사지(毗瑟山 大見寺址)와 용리사지

기자명 임석규

‘삼국유사’ 저술 일연 스님이 35년간 주석했던 대표적 불교사지

비슬산은 팔공산과 함께
대구 영산이며 불교 성지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에는
99개 절 있었다고 알려져

비슬산 최고봉에 대견사지
조사와 발굴 이후 복원불사

신라 헌강왕 창건 추정되나
조선시대의 유구들만 발견

비슬산 용리사지 조사에서
‘대견불만’ 고려기와가 출토

진짜 대견사지가 어디인지
용리사지 정밀 발굴 예정

대견사 전경.

팔공산 갓바위에 기도하러 가는 신도들 사이에는 바위가 많은 곳이 지기가 강해서 소위 ‘기도발’이 잘 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해남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 봉화 청량사가 있는 청량산 등은 거대한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산인데, 특히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있는 비슬산은 거대한 암괴류가 형성되어 있고 지형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에 2003년 12월13일에 천연기념물 제435호로 지정된 곳이다. 암괴류란 암석 덩어리들이 집단적으로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하는데, 비슬산 암괴류는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 거석들로 이루어졌으며, 동일한 사면경사를 나타내는 산지에서 발달하는 암괴류 중 세계에서 최대 규모일 뿐만 아니라 원형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슬산은 팔공산과 더불어 대구를 에워싸 보호하고 있는 영산이자 불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 비슬산에는 99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많은 절을 알지 못한다. 현재는 유가사, 소재사, 용연사, 용문사, 용천사 등 몇 사찰만이 법등을 이어오고 있다.

해동화엄종의 초조인 의상 스님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에는 ‘비슬산 옥천사’가 포함되어 있다. ‘화엄십찰’이 대체로 9세기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하므로 비슬산이라는 명칭 또한 적어도 신라시대부터는 사용했던 것 같다. 또 비슬산은 ‘삼국유사’ 포산이성 조에 보이는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가 성도한 곳이다. 이들은 신라 혜공왕(765∼779) 때의 승려로, 현실성불(現身成佛)한 것으로 보아 아미타신앙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비슬산은 신라시대 의상 스님의 화엄십찰, 관기·도성 스님의 아미타신앙의 중심지였다.

비슬산의 불교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삼국유사’를 저술한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 스님일 것이다. 스님은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22세 때 승과에 급제한 후, 비슬산의 보당암을 시작으로 무주암, 묘문암 등지에 머물렀으며, 인흥사, 용천사 등에서 주석한 시간을 더하여 35년의 세월을 비슬산과 함께하였다.

스님의 속성은 김씨요 경주 장산군(章山郡;지금 경산)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견명(見明)이었으나 뒤에 일연으로 개명했다. 스님이 태어난 1206년은 무신 최씨 정권의 공포정치 시대였다. 무신 정권 아래서 착취와 압제로 핍박받던 백성들이 처절히 항쟁하던 시기였다. 9살에 광주 무등산 무량사(無量寺)에 가서 5년간 학문을 수학했다. 당시는 국학이나 국자감 같은 중앙교육기관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던 난세였기 때문에 공부를 하려면 심산유곡의 산사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견사 삼층석탑

고려말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역옹패설(櫟翁稗說)’에는 “국가가 인재를 등용하려하여도 시험공부를 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짐을 싸매고 멀리 승복을 입은 이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고, 궁벽한 산에 숨어사는 이에게 배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고려사’ 민적전에는 “나라의 습속에 어린이는 반드시 절에 나아가 글을 배웠다. 용모가 수려한 자를 승려나 일반 사람들이 모두 받들어 선랑(仙郞)이라 했다. 무리를 모아보니 혹은 100, 1000에 이르렀다. 그 제도는 신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민적이 10살 때 절에 나아가서 배우니 성품이 영민하여 글 책을 받으면 곧 그 뜻을 통달했다. 얼굴이 그림 같고 풍채가 우아하여 보는 이 모두 그를 사랑했다. 충렬왕이 이를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국선(國仙)을 삼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민적은 명문귀족의 귀공자인데도 절에서 스님에게 글을 배운 것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로 유명한 이승휴도 12세에 원정국사(圓靜國師)의 슬하에서 공부하였다.

일연 스님은 14살 되던 해인 1219년에 선종 가지산문 조사 도의선사(道義禪師)가 40년간 수도하다 열반한 설악산 진전사에 찾아가 도의선사의 탑에 참배하고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며 수행하여 1227년 22살에 승과고시를 보고 상상과(上上科)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급제 후 곧 비슬산 보당암에 주석하여 정진했다.

스님은 1249년(고종 36), 권력자 최우와 처남 매부 관계였던 정안(鄭晏)의 초청으로 남해(南海) 정림사(定林社)로 가게 된다. 이때 일연 스님이 속한 가지산문이 대장경 조판에 참여하고, 수선사와 사상적 교류를 가지게 된다. 즉 가지산문과 중앙 정치권이 연결되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일연 스님은 남해 정림사를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수선사와 사상적 교류를 하였고, 1259년(고종 46)에는 대선사(大禪師)가 된다. 그리고 1261년(원종 2)에 원종의 명에 의해 강화도에 초청되어 수선사의 별원인 선원사(禪源社), 즉 선월사(禪月社)에 주석하게 되었다.(당시 수도가 개경을 뜻하는 것인지 강화로 천도한 후의 강화경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선원사와 선월사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일연 스님은 1264년 남쪽으로 내려와 운제산(雲梯山;迎日) 오어사(吾漁社)에 있다가 비슬산 인홍사(仁弘社)로 옮겨갔는데 이 때 수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1268년에는 왕명에 의해
선·교종의 이름난 스님들을 모아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주도하였고, 1274년에는 포산 인홍사(仁弘社)를 충렬왕의 사액을 받아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하였다. 또 같은 해에 비슬산 용천사(溶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삼는 등의 일련의 활약을 펼친다.

일연 스님은 22세(1227년)부터 44세(1249년)까지 22년간과, 59세(1264년)부터 72세(1277년)까지 13년간을 더해 35년간 비슬산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저술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중앙정부와도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비슬산의 보당암, 무주암, 묘문암, 인흥사, 용천사 등이 스님의 주요 주석처였으며, 그 중 가장 먼저 주석했던 보당암이 지금의 대견사로 알려져 있다.

대견불만명(大見佛卍銘) 기와.

대견사지는 비슬산의 최고봉이라 인식되었던 대견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대견사의 창건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15세기 왕실자료인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는 대견사의 석조관음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서 처음에는 보당암으로 불리다가 조선 초기에 대견사로 명칭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사자료에 의하면 사지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삼층석탑과 오층석탑, 마애불이 있다고 하였으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석탑 1기와 석불 1구만이 보고되어 있다. 이후 1997년 보고서에는 석축, 석렬, 우물지와 도괴되어 있다가 복원된 석탑, 추정 배례석, 연화대석, 마애범라문 등이 보고되어 있다. 사지는 달성군 문화재 정비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에 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조선시대 건물지 6동과 연화대좌, 납환 2점, 명문 막새편 등이 확인되었으며, 2014년에는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대견사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에서는 신라 또는 고려시대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고, 조선시대 건물지만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 중에는 대견사라고 적힌 기와도 있었으나 이 또한 조선시대 기와였기 때문에 대견사의 실체가 명확히 밝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편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는 지난 9월 비슬산에 있는 용리사지를 시굴조사 하였다. 용리사지는 비슬산 대견봉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오는 능선 중단부 등산로 상에 있으며, 비슬산 쉼터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조사지역에는 현재 석탑 1기가 복원되어 있으며 2단의 석축들이 잔존해 있다.

조사결과 이 사지에서는 석축 3기와 석축대지 위에 건립되었던 건물지 2동, 구들시설, 초석 등이 발견되었다. 출토유물로는 통일신라∼조선시대로 편년되는 기와편들과 자기편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출토 유물 중에는 ‘대견불만(大見佛卍)’이라고 새겨져 있는 기와가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이 기와는 청자 및 어골문 기와 등 고려시대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 절터가 고려시대에는 대견사라고 불리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비슬산 정상의 대견사지에서도 대견사명 기와가 출토된 적이 있으나 이것은 조선시대 유물이어서 용리사지의 ‘대견불만(大見佛卍)’명 기와하고는 시기 차이가 난다.

‘대견불만(大見佛卍)’명 기와의 출현으로 용리사지에 있던 사찰의 정체나 성격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일연 스님이 1227년 승과에서 장원급제하고 비슬산에 들어와 처음 주석하신 보당암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용리사지와 현 대견사의 역사적 관계 또한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이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이러한 고민을 안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용리사지를 정밀발굴조사 할 예정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62호 / 2018년 10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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