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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법성게’ 제9구 :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

기자명 해주 스님

아주 미세한 티끌 하나에도 온 법계가 다 들어있다

‘일미진중함시방’의 의미는
크고 작음이 걸림 없는 경계

크고 작음이 본래 하나임을
의상 스님은 꿈을 통해 비유

티끌과 산 꿈에 함께 보는 건
마음이 티끌이고 산이기 때문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무량한 세계와 부처님 있어

미세먼지가 사람 건강 위협
한 티끌에 인과업보 다 담겨

‘화엄경’에서 상즉과 상입의 무애 도리는 불보살과 선지식들의 마정(摩頂)이라든지 집수(執手)라든지 탄지(彈指)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보살들이 입정하고 출정할 때 같은 이름[同名同號]의 부처님들이 보살들의 정수리를 만지며 가피해주시고, 선지식들이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만지거나 손을 잡거나 손가락을 튕기는 등의 방편으로 선재동자를 칭찬하고 삼매와 공덕을 구족하게 해서 해탈경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보현보살이 선재동자를 마정하는 예를 들어보자.

“보현보살이 오른손을 펴서 그 정수리를 만지니 선재가 곧 일체불찰 미진수의 삼매문을 얻었다…. 이 사바세계의 비로자나 부처님 처소에서 보현보살이 선재의 정수리를 만지는 것처럼, 이같이 시방세계의 있는바 세계와 그 세계의 낱낱 미진 가운데의 일체 세계 일체 부처님 처소의 보현보살이 다 또한 선재의 정수리를 만지고, 얻은바 법문도 또한 다 동등하였다.”
(‘입법계품’)

선재동자는 보현보살이 정수리를 만지는 순간, 보현보살이 얻은 미진수 삼매문을 다 얻었고, 이러한 일들이 일체 세계와 세계의 낱낱 티끌 가운데서도 똑같이 이루어짐을 보이고 있다.

의상 스님은 ‘법성게’ 제9·10구의 두 구절이 사법(事法)에 즉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한을 밝히는 것이라 분과하였다. 연기다라니중 ‘티끌’도 사(事)이고 ‘시방’도 사(事)이니, 이 두 가지 사법을 기준으로 하여 (‘원통기’) 공간적으로 밝힌 사사무애의 도리이다.

이중 제9구가 “하나의 미세한 티끌이 시방을 포함한다”라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많은 세계가/ 처소가 각각 다르나 다 장엄해 깨끗하다.
이와 같이 무량이 하나에 들어가되/ 낱낱이 구분되어 뒤섞임이 없다.”
일미진중다찰해(一微塵中多剎海)  
처소각별실엄정(處所各別悉嚴淨)
여시무량입일중(如是無量入一中)
일일구분무잡월(一 一區分無雜越)
(‘세계성취품’)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삼악도와/ 천·인·아수라가 있어서 각각 업보 받음을 본다.”
어일미진중(於一微塵中) 
견유삼악도(見有三惡道) 
천인아수라(天人阿脩羅) 
각각수업보(各各受業報)
(‘십지품’)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각각 나유타/ 무량수 모든 부처님이 그 가운데서 설법하심을 나타내 보인다.”
어일미진중(於一微塵中) 
각시나유타(各示那由他)
무량수제불(無量數諸佛) 
어중이설법(於中而說法)
(‘십지품’)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일체 부처님이 출현하시니/ 일체 법계가 불가사의한 까닭이다.”
일미진중현일체불(一微塵中現一切佛)
일체법계불가사의고(一切法界不可思議故)
(‘입법계품’)

순천 송광사 불조전 53불. 김세영 촬영
순천 송광사 불조전 53불. 김세영 촬영

이와 같이 ‘화엄경’에서는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한량없는 세계가 있고, 한량없는 부처님이 계시고, 한량없는 불자들이 있으며, 널리 불사가 이루어짐을 거듭 설하고 있다.

이러한 ‘일미진중함시방’은 넓고 좁음[廣狹]이나 크고 작음[大小], 많고 적음[多少], 길고 짧음[長短] 등이 서로 걸림 없는 경계이다.

‘도신장(道身章)’에서는 “큼과 작음이 원래 하나이다. 그러므로 작음은 작음을 무너뜨리지 않고 큼을 용납할 수 있고, 큼은 큼을 무너뜨리지 않고 작음 가운데 들어간다”라고 한다. 이 큼과 작음이 본래 하나이고 걸림 없는 경계를 의상 스님은 다음과 같이 꿈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큼과 작음이 걸림 없는 것은 꿈에서 보는 것과 같다. 무아(無我)의 마음이 잠자는 연[睡眠緣]을 말미암아 온전히 티끌이고 온전히 산(山)이니, 적은 부분이 티끌이고 많은 부분이 산인 것은 아니다. 꿈을 깬 마음 가운데도 티끌과 산이 걸림 없이 나타난다.”
(‘원통기’)

꿈에 티끌과 산을 볼 때, 티끌은 마음의 작고 적은 부분으로 보고 산은 마음의 크고 많은 부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티끌이든 산이든 온 마음 전체로 본다. 꿈을 깬 마음으로도 마찬가지이니, 온 마음이 티끌이고 온 마음이 산이라서 티끌과 산이 걸림 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또 “하나의 미세한 티끌 중에 시방 세계를 머금는다.(一微塵中含十方)는 것은 한가지로 머무름 없음[無住]인 까닭에 그러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제자 상원(相員) 스님과의 문답이 ‘원통기’ ‘총수록’의 ‘도신장’ 그리고 ‘석화엄지귀장원통초’ 등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상원 스님이 여쭈었다. ‘미세한 티끌의 머무름 없음은 작고, 시방 세계의 머무름 없음은 큽니까?’
답. ‘똑 같다.[一量]’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미세한 티끌은 작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말합니까?’
답. ‘미세한 티끌과 시방 세계가 각각 자성이 없어서 오직 머무름이 없을 뿐이다. 말한바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란 구하는 곳에서 구한 것일 뿐이니, 작기 때문에 작다고 하고 크기 때문에 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근기 중에서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까닭에 우선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고 설하는 것일 뿐이고, 한결같이 티끌은 작은 자성이고 세계는 큰 자성인 것이 아니다. 또한 티끌이 크고 세계가 작다고도 말할 수 있다. 도리가 가지런히 하나이니 머무름 없는 실상[無住實相]이다.’ ”
티끌이 시방을 포함하는 진함시방(塵含十方)은 티끌과 시방이 한가지로 무주이기 때문이며, 무주는 실상이니 티끌도 실상이고 시방도 실상이다. 실상이 실상을 포용하는 무주실상이다. 그래서 필요에 의해 구하는 대로 존재하니[須處須], 티끌이 크고 세계가 작다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작은 것을 필요로 하면 곧 작고 큰 것을 필요로 하면 곧 크므로, 하나의 티끌 가운데 단박에 시방을 나타내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자재한 이 티끌을 총상으로서의 티끌[摠相塵]이라 한다.
(‘법기’)

균여 스님도 위와 같은 의상 스님의 법문을 인용하면서, 다만 하나의 머무름 없음[無住]인 까닭에 티끌이 스스로 작은 지위를 무너뜨리지 않고 큼을 용납할 수 있으며, 시방이 스스로 큰 지위를 무너뜨리지 않고 작음에 들어갈 수 있으니 큼과 작음이 걸림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큼과 작음이 동일하여 머무름이 없는 것을 밝게 알면 ‘티끌은 크고 세계는 작다’고도 할 수 있다. 시방은 스스로 작은 모양을 갖추고 있고 미세한 티끌은 스스로 큰 모양을 갖추고 있어서, 작음은 작음을 바꾸지 않고 큼을 용납할 수 있고, 큼은 큼을 줄이지 않고 작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원통기’)

‘법계도주’에서도 크자고 하면 곧 크고 작자고 하면 곧 작아서, 하나의 티끌에서 시방을 헤아려 시방이 작은 것이 되고, 시방에서 하나의 티끌을 헤아려 하나의 티끌이 큰 것이 되니, 연기된 것이 없기 때문이고 자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십주품(十住品)’에서는 “지극히 큼에 작은 모양이 있음을 알고자 보살은 이로써 처음 발심한다.(欲知至大有小相, 菩薩以此初發心)”고 설하고 있다. 크고 작은 모양에 걸림 없는 것이 발심 성불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아주 미세한 티끌 하나에도 윤회하는 중생들의 업보가 다 들어 있다. 아주 미세한 티끌 하나에도 온 법계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단지 법계에 증득해 들어가지 못한 중생에게는 법계의 무진 경계가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집을 떠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자기 집 소식을 잘 모르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먼지가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어서 요즈음 미세먼지 경보를 자주 듣는다. 먼지 하나에도 인과의 업보가 다 들어 있음을 깊이 새겨야 하겠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62호 / 2018년 10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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