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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불교 재건의 성지 강가라마 마하위하라

식민수탈 상처 옹이진 콜롬보, 파아나두라 신호탄에 불교부흥 거점으로

고대 상인 무역거점이던 콜롬보
유럽 열강 침략 후 요새로 이용
향신료·차·면화 등 실어 나르며
식민지 자원수탈 관문으로 개발

콜롬보 남부 마을 파아나두라서
기독교와의 공개 교리 논쟁 벌여
구나난다 스님 논리로 기독교 제압
독립·불교재건의 전환점 만들어

교육불사 앞장선 수망갈라 스님
콜롬보에 창건한 경전교육 도량
곳곳에 대학 설립 인재양성 박차

스리랑카불교 부흥의 신호탄이 된 파아나두라 대논쟁을 주도했던 히카두웨 수망갈라 스님은 스님들에게 경전을 지도하기 위해 1885년 강가라마 마하위하라를 창건했다. 인재불사를 통해 불교부흥과 독립의 기틀을 다진 이곳 사원은 스리랑카불교의 성지로 손꼽히고 있다.

계절풍 따라 부드럽게 밀려오는 인도양의 파도는 고대로부터 이국의 상인들을 실어왔다. 아찔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향신료와 형형색색의 보석들이 화수분 같이 끊이지 않는 섬. 인도,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아랍 그리고 중국의 상인들은 셀렌디브라 불리는 이 섬에 열광했다. 후대 ‘해양실크로드의 배꼽’이라 평가되는 무역의 요지, 그 명성만큼이나 섬은 풍요로웠다. 섬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 ‘콜롬보’는 그 역사의 주인공이다. ‘콜론토타(켈라니강의 항구)’ ‘콜라암바토타(녹색 망고가 많은 항구)’라는 이름의 바닷가 도시는 고대 상인들, 혹은 탐험가들 사이서 꽤나 유명한 ‘핫 플레이스’였다. 이미 2000여년 전부터 무역상들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8세기에는 이슬람상인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기도 했다. 14세기 섬을 방문한 이슬람 학자이자 여행자 이븐 바투타(1304~1368)는 ‘칼란푸(Kalanpu)’라는 이름으로 콜롬보를 기록하며 ‘셀렌디브의 가장 훌륭한 도시 가운데 하나’라 평가했다. 때로는 왕국의 임시수도가 될 만큼 번영을 누렸다. 역사상 최초의 통일을 이루었던 대왕 둣타가마니의 어머니 위하라 마하데비도 콜롬보 인근 켈라니야 출신이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바다는 더 이상 풍요의 젖줄이 아니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지는 침략자들은 바다를 건너와 섬의 해안가를 장악해나갔다. 500여년에 이르는 식민지의 역사는 파도를 따라 밀려들어왔다. 인도양은 눈부시고 서글픈 푸른빛이었다.

그러니 콜롬보가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알려진 것이 결코 유럽의 성과라 할 수는 없다. 항구도시 콜롬보에 1505년 포르투갈의 함선 등장 후 요새로 변모했다는 표현이 맞다. 포르투갈인들은 ‘해적들로부터 자국 상단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바닷가에 성을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 이 성이 지금 콜롬보포트 지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은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에 넘어갔다.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성을 점령한 네덜란드 상인들은 콜롬보 주변에 계피를 재배해 무역품으로 삼았다. 이때 조성된 계피 재배지는 지금 ‘시나몬가든’으로 불리는 도심지역이 되었다.

구나난다 스님이 파아나두라에서 기독교인들과 벌인 대론을 기념하는 랑콧위하라.

네덜란드에 이어 1800년대 등장한 영국은 ‘콜라암바토타’라는 불리는 이 도시를 ‘콜롬보’라 발음했다. 1815년 영국이 스리랑카 전역을 점령한 뒤 콜롬보는 본격적으로 영국 식민지배의 거점이 되었다. 콜롬보항을 통해 향신료, 차, 면화, 고무, 목재 등 보물섬의 자원을 실어 날랐다. 2차 세계대전 중엔 콜롬보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도시의 변모는 수탈당한 식민지의 상처였다.

수탈은 스리랑카 국민들의 허리를 옥죄었지만 불교의 위상을 깎아 내리려는 영국의 책략은 불교의 숨통을 조르는 대신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중심지 또한 해안가의 도시들, 특히 콜롬보였다. 기독교를 앞세워 민족의식까지 말살시키려는 영국의 획책에 고사할 듯 위태롭게만 보이던 법등은 기적처럼 다시 빛을 뿜었다. 1873년 8월26일, 콜롬보 남부의 작은 시골마을 파아나두라에서 모호티왓테 구나난다(1823~1890) 스님이 불교를 ‘우상숭배의 미신’으로 비하하던 기독교에 맞서 공개 대론을 펼쳤다. 구나난다 스님은 영국인 목사 데이비드 드 실바와 전도사 사리만나를 상대로 기독교리의 모순을 지적하고 불교에 대한 비하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스리랑카 불교의 명운을 건 역사적인 설전이었다.

1만여명의 군중이 운집한 파아나두라의 대론장에서 구나난다 스님은 기독교인들이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유일신과 기독교 경전의 허점을 논리정연하게 펼쳐 보였다. 또 윤회, 연기, 깨달음 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무지를 날카롭게 파헤쳤다. 정법의 교리로 무장한 구나난다 스님의 논리는 대론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론이 끝났을 때 터져 나온 참가자들의 환호는 불교가 승리했음을 말해주었다.

강가라마 마하위하라에는 각국에서 이운해온 불상과 불교문화재 등이 가득하다.

파아나두라 대논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식민지 스리랑카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미국 남북전쟁의 참전 영웅이었던 올코트(1832~1907) 대위와 그의 부인 브라밧츠키는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에 감명해 미국인 최초의 불자가 되었다. 1875년 뉴욕에 신지협회(The Theosiphy Society)를 설립, 인도와 스리랑카 불교부흥운동에 힘을 보탰다. 1880년에는 직접 스리랑카로 건너와 불교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신문과 각종 포교 책자들을 발행하고 각 지역마다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와 같은 불교 부흥운동의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불교를 부흥시키고 나아가 독립의 초석을 마련하는 노력은 불교계에서도 전개됐다. 콜롬보 시내, 베일라호수가에 자리하고 있는 강가라마 마하위하라는 그 노력의 산물이다. 1885년 히카두웨 수망갈라(1827~1911) 스님이 창건한 이 사원은 스리랑카불교 재건운동의 한 축이었다. 수망갈라 스님은 구나난다 스님과 함께 파아나두라 대논쟁을 주도했던 스리랑카 불교계의 어른이었다. 파아나두라 대논쟁에 감명 받아 스리랑카를 찾은 올코트 대위 또한 스님에게 불교와 팔리어를 배웠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있는 보르부드르사원의 모습을 재현한 장소도 있어 눈길을 끈다.

수망갈라 스님 또한 스리랑카불교 재건의 단초를 교육에서 찾았다. 파아나두라 대논쟁이 벌어진 같은 해 남부해안에 위도다야 피리웨나 학교를 설립했다. 학생들에게는 불교철학을 비롯해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그리고 스리랑카 전통문화를 가르쳤다. 처음 이 학교의 학생은 일곱 명에 불과했지만 후일 코테대학으로 발전했다. 1875년에는 콜롬보에 비다랑카 피리웨나 학교(현재의 켈라니야대학으로 발전)를 설립해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밖에도 아난다대학(콜롬보. 1886), 마힌다대학(갈레. 1892), 다르마라자대학(캔디. 1887) 등의 설립을 이끌며 인재불사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스리랑카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인재 배출의 밑거름이 되었다.

강가라마 마하위하라는 수망갈라 스님이 출가자들에게 경전을 지도하기 위해 창건한 사원이다. 역사는 100여년 남짓이지만 스리랑카불교 재건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스리랑카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성지다.

사원에서는 미얀마의 백옥으로 조성된 좌불상을 비롯해 부처님 진신사리와 방글라데시 정부가 기증한 불교 유물들을 봉안한 진신사리관, 그리고 인도네시아 보르부드르사원 복재 등 전 세계 다양한 불교문화재들을 만나볼 수 있어 거대한 불교박물관 같다. 콜롬보를 찾는 불자들뿐 아니라 국빈들의 방문도 빈번하다. 특히 매년 2월 열리는 ‘나왐 마하 페라헤라’는 우리나라의 연등축제와 같이 콜롬보를 대표하는 불교축제로도 손꼽힌다.

아누라다푸라 스리마하보디의 후손인 이 보리수는 강가라마 마하위하라를 찾는 불자들에게 가장 신성한 경배의 대상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강가라마 마하위하라에서도 가장 중요시되는 장소는 바로 보리수다. 이 보리수는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성스러운 보리수 스리마하보디의 후손이다. 싱할라왕국에 처음으로 비구니계맥을 전한 상가미타 스님이 가져온 성도 보드가야 보리수의 후손이 이곳 콜롬보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여법한 도량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야할 것이 세 가지 있다. 불상을 모신 법당과 사리를 모신 탑, 그리고 보리수다. 반드시 스리마하보디의 후손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보리수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던 250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여겨진다.

작은 단지에 물을 담아 두 손으로 받쳐 든 불자들은 보리수 주변을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 나무뿌리에 물을 붓는다. 부처님께 예경하고 공양 올리는 것과 똑같다. 법당보다 보리수 앞에 모요드는 이들이 더 많은 이유다. 그들에게 부처님의 숨결은 2500여년 변함없이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63호 / 2018년 11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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