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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원각경’과 노스님

기자명 이제열

무식을 깨달음 지름길로 여겨서야

불교방송서 원각경 강의 당시
스님에게 깨달았나 추궁 받아
깨닫지 못하면 강의 할 수 없나

어느 날 조계사 부근을 산책하는데 한 노스님이 나를 알아보고는 할 말이 있다면서 차 한 잔 사달라고 말씀하셨다. 가까운 찻집으로 모시고 가서 용건을 여쭈었더니 “요즘 불교방송에서 ‘원각경’ 강의를 하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스님은 “‘원각경’은 원각의 도리를 깨달아야만 알 수 있고 해설할 수 있는 법인데 법사는 원각을 깨달았는가?”고 마치 추궁이라도 하듯이 물었다.

이에 나는 “그럼 스님은 ‘원각경’을 들을 때에 깨닫고 들으셨습니까?”하면서 “스님 말씀처럼 원각의 도리를 깨달아야만 ‘원각경’을 설할 수 있다면 듣는 것 역시 원각을 깨달아야만 제대로 들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은 내 말에 기가 차는지 바랑을 어깨에 메고는 두말하지 않고 찻집을 나가버렸다.

종종 겪는 일이지만 오래도록 경전 강의를 하다 보니 이런 경우처럼 공격 아닌 공격을 당하는 수가 있다. 더러는 나에게 “부처님 공부는 자기가 깨달아 자기 말을 하는 것인데 당신은 석가가 뱉어 놓은 말만 늘어놓는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자신의 살림살이가 어떤지 꺼내 보여달라”는 요구를 한다.

특히 이런 일은 불교교학을 공부한 사람들보다는 참선수행에 우월감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다. 외골수로 참선만 강조하는 수행자들은 경전 강의하는 사람들을 어줍지 않게 보기도 하고 더러는 건방지다고까지 생각한다. ‘참선 우월주의’ ‘깨달음 만능주의’가 만든 기형적 수행자의 모습이다.

그들은 우선 깨달음을 이루면 세상 모든 일이 다 해결된다고 착각한다. 생사해탈은 물론 일체의 괴로움이 해결되고, 우주의 근본원리를 알며, 배우지 않아도 부처님 법문이 절로 터져 나온다고 믿는다. 한 생각 깨달으면 일체 만법을 통달하는데 수행만 하면 되지 경전 공부는 해서 무엇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 어디를 찾아보아도 깨달아야만 경전을 해설할 수 있다거나 남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설하신 적이 없다. 금상첨화로 이해된 경전에 깨닫기까지 하여 해설하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원칙이고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면 세상에 전법할 사람은 둘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불교 일을 한지 40년이 넘었지만 참선해서 깨달아가지고 경전을 설하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보았다. 경전 공부 안 해도 깨달음을 이루기만 하면 경을 자유자재로 강의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수행자들은 마치 영어를 안 배워도 미국만 가면 영어를 마음껏 구사한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수행자들은 교학을 탐구하고 경전을 강의하는 강사 스님들보다 산속에서 참선하는 수좌 스님들을 우월하다고 여긴다. 한국불교가 쇠락해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렇게 무식을 깨달음의 지름길로 여기는 수행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산속에서 참선하는 수좌 스님들보다는 경전 공부 많이 하고 설법하는 스님들이 공양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을 먼저 이루고 나중에 설법하겠다는 것은 하세월 기약도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만약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면 평생을 허송세월 보낸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고 평생을 자기 혼자 깨닫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수행자가 왜 공경 받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이는 극히 반발하면서 참선하는 수행자들을 모독한다고 하겠지만, 나는 ‘참선 우월주의’ ‘깨달음 만능주의’에 사로잡혀있는 수행자들을 비판하는 것이지 바른 견해를 지니고 참선하는 수행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무식을 기반으로 한 깨달음 한탕주의를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차 한 잔 비우지 못하고 떠난 노스님은 아마도 나를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섭섭해 할지 모른다. 지면을 통해 이해를 구한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464호 / 2018년 11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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