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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할 때는 마음 뒤섞이지 않게 전일해야

중국 정공 스님의 '무량수경청화' 법문 ㉔

‘아미타불’ 명호에는 의미 무궁
일심전념하면 그 의미 맛볼 것
염불법문만이 일생에 성취도와
이것 아니면 내생에 윤회 계속

정공 스님은 염불하려면 항상 마음이 뒤섞이지 않게 전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공 스님은 염불하려면 항상 마음이 뒤섞이지 않게 전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극락세계 보살은 갖가지 변재를 구족하고 총지를 얻어 걸림 없이 자재하고, 세간을 잘 이해하여 가없는 선교방편으로 설법하나니, 그 설법은 성심에서 나온 말로 진실하여 (듣는 이는) 의리와 법미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느니라. 모든 유정을 제도하기 위해 진정한 도법을 연설하시니, 곧 (경계 상에서는) 상에 집착함도 조작함도 없고, 무명번뇌도 해탈도 없어야 하며, (수행 상에서는) 일체 사량분별도 없고, 전도망상을 멀리 여읠지니라(辯才總持 自在無礙 善解世間無邊方便 所言誠諦 深入義味 度諸有情 演說正法 無相無爲 無縛無脫 無諸分別 遠離顚倒).”

부처님께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것은 모두 방편문이라 합니다. 일체중생은 부처님의 선교방편으로 인해 진실에 계입(契入)할 수 있습니다. 계입은 증득(證得)한다는 뜻이고, 진실은 우주인생의 진실상을 말합니다.

‘성(誠)’은 성심에서 나온 말로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이고, ‘제(諦)’는 확실히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한 글자 한 문구 모두 성심에서 나온 말로 진실합니다. 세간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해 불교를 종교라고 여기고, 그것이 중생을 기만한다고 여깁니다. 이는 정법을 비방하는 큰 죄악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참되고 진실합니다.

‘의(義)’는 의리이고, ‘미(味)’는 법미입니다. 여기서 그 법미는 무궁무진합니다. 불법은 진실로 이러합니다. 불교를 처음 접할 때 ‘무량수경’에서 시작하면 틀림없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배우고,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며, 나아가 장래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어도 여전히 ‘무량수경’을 배울 정도로 그 법미는 무궁무진합니다. 이 경을 독송할 때마다 매번 맛이 다르고, 매년 경계가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입니다. 진정으로 의미에 깊이 들어가야 이런 힘이 생깁니다.

‘무량수경’의 의미만 무궁할 뿐만 아니라 한마디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도 의미가 무궁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것을 맛볼 수 있을까요? 일심으로 전념(專念)하면 무궁한 의미를 맛보게 됩니다. 법미를 맛본 후에는 그만 두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학습하는 동안 환희심이 일어나고 용맹정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염불을 해도 법미를 맛보지 못하는 것은 아미타불을 염할 때 다른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부하여 득력하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계속 노력하여 착실히 염불하여야 합니다. 일심에 장애되는 것을 모두 버리고 성심 청정심 공경심으로 일년 반 동안 염불하면 법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법미를 맛본 후 극락세계에 왕생할 자신이 생기고, 염불할수록 신심이 단단하고 강해지면 미리 가는 때를 알고 왕생할 수 있습니다.

공부가 더 깊어지면 자재하게 왕생할 수 있고, 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어 진정으로 생사에 자재한 경지에 이릅니다. 이는 우리들 각자 다 해낼 수 있지만, 문제는 전념하느냐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각명묘행(覺明妙行) 보살께서는 ‘서방확지(西方確指)’에서 매우 또렷이 말씀하셨습니다.

“염불시 가장 금해야 하는 것은 뒤섞는 것이다. 뒤섞으면 마음이 전일하지 못하다.”

‘도(度)’는 도움이고, ‘연(演)’은 표연(表演)함이며, ‘설(說)’은 언설입니다. 일체중생을 돕고 그를 위해 정법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말로 설명합니다.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상응하지 않으면 듣는 사람은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법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뿐이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몸으로 힘써 행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오늘날 정토법문을 배우면 우리는 ‘무량수경’에 의지하여 ‘무량수경’의 도리를 우리의 사상·견해로 바꾸고, ‘무량수경’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활상 행위로 바꾸어서 이 경전의 말씀을 전부 일상생활에서 표현하고 모두 성취하여야 합니다. 성취한 후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흠모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십니까?’ 이 때 그에게 다시 권하면 당연히 받아들이고 믿을 것입니다.

만약 불교를 배운다면서 내내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 눈에 몹시 괴로워 보일 것입니다. ‘난 불법을 배우지 않을 거야. 이런 사람이 불교를 배우고 있으니!’ 이런 말을 듣고서 계속 권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자신이 즐겁고, 원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면 ‘네 모습이 왜 이렇게 좋지?’ 하고 물어볼 것입니다. 연(演)은 결코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불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자신이 실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불보살께서 중생을 교화하고 일체법문을 말씀하신 것은 모두 대중을 유도하는 방편설로 정설이 아닙니다. 정설은 일심으로 염불하여 정토에 태어나길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말미에 염불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일반 범부는 염불법문을 믿지 않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는 ‘믿기 어려운 법(難信之法)’입니다.

그래서 불보살님께서는 자비심으로 노파심에 갖가지 선교방편으로 유도하여 이러한 경계에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진정으로 이러한 경계에 들어가면 불보살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오직 염불법문만이 우리를 도와 일생에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 법문이 아니면 이번 생에 절집에서 선근을 조금 심었을 뿐 내생에 예전대로 다시 윤회합니다.

‘무상(無相)·무위(無爲)·무박(無縛)·무탈(無脫)’ 이 네 문구는 경계 상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무(無)’란 집착하지 않음이고, ‘위(爲)’는 조작함입니다. 불보살님께서는 매일 중생을 위해 경전을 강설하고 법문을 설하십니다. 그것은 ‘위’입니다. 그는 일을 하지만 집착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해 일을 하나 일을 함이 없고, 일함이 없으나 일을 합니다. 마음바탕이 청정하여 한 티끌도 물들지 않고, 인연에 수순하여 일을 합니다. 이런 경계가 바로 ‘무상무위’로 상에 집착하지 않음입니다.

‘박(縛)’은 바로 번뇌이고, ‘탈(脫)’은 해탈입니다. 심지가 청정하여 분별 집착이 없는데, 어디에 번뇌가 있고 어디에 해탈이 있겠습니까? 번뇌와 해탈은 대립적인 개념으로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 쪽도 당연히 없습니다.

‘일체 사량분별도 없고, 전도망상을 멀리 여읨’은 수행 상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 같은 수행을 닦아 앞의 경계에 도달하면 이는 제불 대보살의 경계입니다. 이것은 보살수행의 총강령입니다. 극락세계의 보살은 모두 이를 강령으로 삼습니다.

허만항 번역가 mhdv@naver.com

 

[1464호 / 2018년 11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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