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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경주 천관사지(天官寺址)

기자명 임석규

한국 석탑에 유례가 없는 사각기단 갖춘 팔각석탑 부재들 출토

경주 천관사의 창건설화는
김유신과 천관녀 사랑 유명

창건설화 역사서엔 기록없고
고려 이인로 ‘파한집’에 수록

‘삼국유사’에는 창건설화 대신
원성왕 왕위 승계 기록이 남아

천관은 기녀의 이름이 아니라
여제사장 가능성 오히려 높아

석재 구하는 주민들에 의해
1919년 석탑의 탑신석 파괴

이후 계속 파괴가 진행되어
석탑의 하층부 기단만 남아

흩어져 있는 부자재 모아서
몇차례 걸쳐 복원도 그려져

2015년 불교문화재연구소
원형에 근접한 복원도 남겨

경주 천관사지의 현재 모습.
경주 천관사지의 현재 모습.

1919년 오가와 케이키치(小川敬吉, 1882~1950)는 경주 천관사지 인근을 지나가고 있었다. 오가와는 1916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일원으로 한국에 건너와 1944년 귀국할 때까지 많은 유적을 조사했던 인물인데, 마침 천관사지를 지날 때 사람들이 탑신석을 깨트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오가와는 일단 이들을 저지하고 이장과 경찰관에게 유적의 보호를 의뢰했다고 한다. 오가와 케이키치의 1919년도 천관사지 방문은 조사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석탑의 피해상황 정도를 파악했던 것 같다. 이후 본격적인 조사는 1923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진행되었다. 당시 오가와가 조사했던 천관사지 관련 자료는 일본 동양문고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고고자료 화상데이터베이스에 잘 남아있다.

자료에는 당시 현황을 보여주는 2컷의 사진과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탁본, 석조유물 배치도 및 실측도, 탑재 복원도 등 총 30장의 화상자료가 실려 있는데, 주목되는 것은 석탑 자료이다. 남아 있는 기단부 부재와 탑신석, 지붕돌의 잔편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석탑은 사각기단을 갖춘 팔각석탑이란 점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붕돌 하부의 받침이 일반적인 계단형이 아닌 3단의 연화문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흥미를 가졌던 것 같고 이를 반영하듯 석탑 부재가 극히 일부만 남아있음에도 이를 토대로 석탑복원도까지 작성하였다.

사적 제340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관사지는 도당산과 경주 오릉(사적 제172호) 사이에 있다. 도당산은 남산의 북쪽 끝에 있으며, 이 산이 서쪽으로 점차 낮아져 평지를 이룬 곳에는 사지와 마을이 조성되었다. 사역 북쪽 500m 지점에는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남천이 있고, 사역 동쪽에 인접해서는 도당산을 휘감아 도는 농업용수로가 정비되어 있다. 사지 반경 1㎞ 부근에는 많은 유적이 있는데, 북쪽에는 경주 월성(사적 제16호)과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사적 제457호), 인용사지(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0호), 경주 재매정(사적 제246호) 유적 등이 있고, 동쪽에는 도당산성, 교동왕정곡사지 등이 있다.

2004년 ‘경주 천관사지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사지도 예전에는 밭으로 경작되다가 농업용수로가 조성된 1960년대 이후부터는 개간하여 논으로 경작되었으며, 탑지는 고추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탑지 일원에는 석탑 하층 기단부가 남아있고 그 외 석탑재와 초석, 치석재 등이 흩어져 있다.

지정구역의 서쪽과 북쪽에는 천원마을이 있다. 1992년 보고서에는 민가 담장 아래에 석탑 상층기단 갑석과 면석, 지대석 등 4매 정도의 석탑재가 매몰되어 있다고 보고되어 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유물은 지정구역과 그 외곽 지역에 광범위하게 산포해 있다. 기와는 대부분 통일신라시대 선문 와편이고, 고려시대 집선문 와편과 무문 전돌편이 소량 있다. 토기편은 통일신라 압인문, 격자문 토기편과 뚜껑편 등이 있고, 자기편은 고려시대 청자편이 있다.

천관사지는 김유신과 천관녀에 얽힌 창건설화로 인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각인된 창건설화는 역사서에 수록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편찬한 시화집인 ‘파한집’에 수록된 것이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유신은 계림인이다. 업적이 눈부시었음은 국사에 널리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 어머니는 교유함에 잊지 말도록 날마다 엄한 가르침을 더하여 하였다. 하루는 천관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어머니는 얼굴을 마주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주야로 너의 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공명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의 영광이 되어야 하거늘 지금 너는 술을 파는 아이와 함께 유희를 즐기며 술자리를 벌이고 있구나” 하면서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김유신은) 즉시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그 집 문 앞을 지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다. 하루는 피로에 지쳐 술을 마신 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김유신이 탄) 말은 옛길을 따라서 잘못하여 천관의 집에 이르고 말았다. (김유신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천관은)눈물을 흘리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깨우친 바가 있어서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은 버리고 되돌아왔다. 그녀가 원망하는 노래를 한 곡 지었는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경주에 천관사가 있는데 즉 그 집이다.

‘파한집’에는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윤색된 천관사 창건설화의 근간이 되는 위의 기사와 함께 고려 전기의 문인 이공승(李公升, 1099~1183)이 천관사를 방문하여 지은 시가 실려 있다. 이공승의 시 역시 위의 기사 내용을 함축적으로 묘사한 시라는 점에서 본다면 천관사 창건에 얽힌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는 고려 전기에도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연 스님은 그 유명한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싣지 않았다. 다만 ‘삼국유사’ 기이편의 원성대왕조에는 신라 38대 원성왕의 왕위계승 과정을 담은 기사에 천관사가 등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재상으로 있을 때 나중에 왕이 된 김경신은 각간으로 그의 차석 자리에 있었다. 왕이 꿈에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손에 12현금을 잡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을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복두를 벗는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잡은 것은 칼을 쓸 조짐이요,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들어갈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하지 않았다. 이때에 아찬 여삼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승낙하니 아찬은 “공께서 지금 꺼리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왕이 꿈을 점쳤던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자 아찬이 일어나서 절을 하고 말하기를 “이 꿈은 매우 길한 꿈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가도 나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꿈을 풀어보겠습니다”하였다. 왕이 곧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서 해몽을 청하니 그가 말하기를 “복두를 벗는 것은 윗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요,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천관사 관련 기록이 대부분 김유신과 천관녀에 얽힌 이야기 위주로 기술되는 것과 달리 ‘삼국유사’의 기사에는 신라 38대 원성왕의 왕위승계의 조짐을 보여주는 길몽의 소재로 천관사 우물이 등장한다. 이 기록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흰 갓을 쓰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는 것이 왕이 되어 궁궐에 들어갈 징조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김유신이 천관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천관사를 세웠다는 속설은 문헌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사찰 역시 개인원찰이 아니라 국가에서 직접 경영한 사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즉 천운을 살펴 정치적 자문을 하던 기관이거나 국가가 주관한 제사를 거행하던 사원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천관(天官)이 기녀의 이름으로는 맞지 않으며, 그 실체는 창기가 아니라 여제사장이라는 견해도 있다. 천관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여 천운을 살피고 제사를 주관하던 여사제(女司祭)일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천관사의 성격은 바로 천관에 의해 국가차원의 제사가 거행되던 중요한 사찰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주목된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2015년 천관사지를 조사하면서 현장과 인근 마을에 남아있는 석조 부재들을 모두 확인해 보았다. 현재 지정구역 안에는 석탑재 21매, 초석 5매, 치석재 2매, 장대석 1매가 있고, 쐐기흔적이 있는 치석재가 1매 있다. 천원마을 일원에서는 연자방아 2매와 장대석 2매, 치석재 1매가 확인되었다. 또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석탑 상륜부재 1매와 석등재 2매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있고, 사지에서 반출된 것으로 전해지는 석탑 기단면석 1매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남아 있는 부재들로 미루어볼 때 천관사지에 있던 석탑은 당시 신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던 형태의 석탑이었기 때문에 몇 차례 복원도가 그려졌다. 1923년에 작성된 오가와 게이키치의 복원도는 3층의 탑신에 옥개석은 2층까지만 표현했다. 그리고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인 연화문 옥개 받침을 1층에만 표현해 놓아 아쉬움과 의문점이 많은 도면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도 2000년에 천관사지를 발굴 조사한 후 보고서에 석탑복원도를 게재했다. 발굴 성과를 반영해 석탑 기단부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옥개석 받침을 모두 계단형으로 표현해 놓은 점은 치명적 오류이다. 아마도 오가와 케이키치의 자료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15년 천관사지 석탑 복원도를 작성했다. 기존의 조사자료를 모두 취합했으며 국내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조선총독부와 오가와의 자료들을 새롭게 발굴하여 복원연구의 기초자료로 삼았다. 특히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던 옥개석을 천관사지에서 반출된 것으로 판단하여 복원도에 반영하였으며, 도면은 ‘한국의 사지’보고서에 게재했다. 이미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문화재의 복원도를 그리는 일은 기본적으로 조사 당시의 정보까지만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결국 얼마나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연구 성과를 반영하느냐가 관건이며, 연구의 발전과 함께 도면도 진화해 나간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석탑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특이한 형태의 천관사지 석탑이 제대로 복원되는 날이 기다려진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64호 / 2018년 11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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