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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8․15․23대 총무원장 석주 스님-상

승속 막론하고 존경 받았던 근현대 한국불교 혁신운동가

조계종총무원장 3회 역임했지만
재임기간 합쳐 1년 10개월 불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스님

신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상경
선학원 남전 스님 은사로 출가
6년 고된 행자생활로 습의 익혀
선학원서 만해 스님과 인연맺어

범어사 강원서 6년 경전 익히고
경전 한글화·대중화 원력 세워
1941년 청담·운허 스님 등과
불교개혁 위한 ‘유교법회’ 참가

1971년 11월19일 서울 도선사에서 열린 다비식을 끝으로 청담 스님의 장례는 마무리됐다. 그러나 조계종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불교정화운동을 이끌고 통합종단의 기틀을 다졌던 청담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은 망망대해에서 조타수를 잃은 격이었다. 종단 최고 실력자의 공백을 누가 메울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포스트 청담’에 대한 논의로 수군거렸다. 이 무렵 중앙종회는 11월22일 제27회 정기회를 소집한 상태였다.

‘동아일보(1971년 11월25일)’에 따르면 11월22일 열린 중앙종회에서는 차기 총무원장을 두고 소장파와 중진급스님들이 대립했다. 월탄 스님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30여명은 ‘세대교체론’을 내세우며 40대의 행원 스님을 차기 총무원장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 벽안 스님 등 중진스님들은 ‘종단안정론’을 내세우며 전 총무원장 영암․경산 스님을 다시 추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양측은 이날 밤 늦게까지 회동을 갖고 의견을 모았지만 좀처럼 시각차를 좁히지 못했다. 다음 날 오후까지 이어진 논의 끝에 양측은 ‘석주 스님 총무원장론’으로 극적인 타결을 이뤘다. 양측 모두에게 “청정비구로 신앙심과 수도자적 자세를 갖췄고, 불교의 사회화를 위해 노력하고 때 묻지 않은 삶을 살았던” 석주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추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제3대 중앙종회 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속개된 회의에서 용명 스님은 “청담 스님은 훌륭한 원장이니 후임 또한 덕망, 지혜, 수완을 가진 사람이라야 한다”며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지 않고 훌륭한 원장을 모시려면 칠보사 석주 스님이 적임”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월탄 스님도 “청담 스님이 다 못한 일을 이어가는 우리들은 그 누구보다도 정신력이 투철하신 석주 스님을 당연히 원장으로 모셔야 한다”고 재청했다.

이날 중앙종회는 만장일치로 석주 스님을 제8대 총무원장으로 추대했다. 이 소식을 접한 석주 스님은 이날 오후 회의장을 찾아 “나는 이런 자리에 나올 수 없으니 다시 논의해서 다른 분을 선출해 달라”고 고사했다.

그러나 중앙종회의원들은 박수로 총무원장 추대를 재확인했다.

중앙종회가 석주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추대하는 것에 큰 이견이 없었던 것은 이날 용명 스님의 발언처럼 석주 스님은 승속을 막론하고 존경을 받아온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한국불교의 혁신을 주장하며 변화의 중심에 섰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특별한 정적도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석주 스님은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 유일하게 총무원장을 세 번 맡았다. 그러나 3회의 재임기간을 모두 합쳐도 1년 10개월에 불과할 만큼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스님이었다.

석주 스님은 1909년 경북 안동 금계산 기슭 옹천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부터 마을에 있던 ‘사익재’라는 글방을 찾아 ‘천자문’을 시작으로 ‘명심보감’ ‘동몽선습’ ‘사략’ ‘통감’을 차례로 배웠다. 어려서부터 학구열이 높았던 스님은 한문공부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새롭게 밀려들어오는 신학문을 배우고자하는 열망이 마음속을 가득 메웠다. 때마침 서울에서 필방을 운영하던 먼 친척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스님은 열네 살 되던 해 상경했다. 그곳에서 친척의 일을 도우며 신학문을 배워보겠다는 요량이었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워보겠다는 석주 스님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친척이 빚보증을 잘못 서면서 석주 스님의 서울 생활은 여의치 않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친척은 필방을 자주 찾던 남전 스님에게 석주 스님을 부탁했다.

남전 스님은 일제강점기 민족불교의 정체성을 계승하기 위해 만공, 용성, 혜월, 도봉, 석두, 상월 스님 등과 더불어 선학원을 창건한 스님이었다. 학문이 높았고 선지가 밝은 선사였으며 빼어난 명필인 데다 계행이 철저하기로 소문난 스님이었다. 석주 스님은 남전 스님을 따라 선학원에서 생활하게 됐고, 이것이 불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됐다. 남전 스님과 출가인연을 맺고 ‘정일’이라는 법명을 받아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석주 스님이 구술한 ‘나의 행자시절’(월간해인 176호)에 따르면 선학원에서 시작된 행자생활은 6년간 지속됐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도량을 청소하고 방방마다 군불을 지피며 대중스님들의 공양을 준비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열다섯 어린 석주 스님이 감당하기에는 고된 하루하루였다. 그럼에도 “마음에 틈이 생기면 쓸데없는 생각이 끼어들어 사람이 게으르게 된다”는 은사스님의 당부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선학원에서의 고된 행자생활은 석주 스님이 수행자로서의 습을 익히는 계기가 됐다. 석주 스님은 “6년 동안 선학원에 있으면서 은사스님을 비롯해 선학원에 주석하던 스님들의 언행과 전국에서 모여들던 선객들을 보며 자연스레 불교가 무엇인지, 수행승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눈여겨 볼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41년 2월26일부터 10일간 선학원에서 개최된 유교법회에 참가한 스님들. 법회 이후에는 범행단을 조직하고 선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양하기 위한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석주 스님(사진 앞쪽에서 넷째 줄 맨 왼쪽)도 이 법회에 참석했다. 출처=‘한국불교100년’ (민족사)
1941년 2월26일부터 10일간 선학원에서 개최된 유교법회에 참가한 스님들. 법회 이후에는 범행단을 조직하고 선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양하기 위한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석주 스님(사진 앞쪽에서 넷째 줄 맨 왼쪽)도 이 법회에 참석했다. 출처=‘한국불교100년’ (민족사)

 

석주 스님이 만해 스님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만해 스님은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경에 잡혀 수감생활을 한 뒤 선학원을 중심으로 대중불교 운동을 펼쳤다. 조국의 독립과 불교유신을 열망한 만해 스님의 강직함은 어린 석주 스님에게 큰 귀감이 됐다. 석주 스님은 만해 스님의 대중강연을 쫓아다녔고, 그럴 때마다 청중을 사로잡는 박학다식하고 출중한 웅변력을 가진 만해 스님에 탄복했다. 만해 스님이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했을 때는 그 시집을 알리기 위해 책방마다 시집을 돌렸고, 시집을 판 돈을 수금해 스님에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런 만해 스님과의 인연은 훗날 석주 스님이 불교혁신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배경이 됐다.

석주 스님의 행자생활은 1928년 범어사 강원에 입방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다. 당시 범어사에는 대중들만 300명이 넘었고, 불교전문강원에서 공부하는 학인수도 60여명에 달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달랐던 스님은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치문’ ‘서장’ ‘도서’ ‘선요’ ‘절요’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금강경’ ‘화엄경’을 차례로 익혔다. 6년간 하루도 산문 밖을 나가지 않고 오직 경전공부에만 열중했다. 스님이 “경전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이정표”라며 경전한글화와 대중화 원력을 세운 것도 이때였다.

1933년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은사 남전 스님을 시봉하기 위해 다시 선학원으로 돌아왔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스승은 스님에게 오래된 옛 구슬이라는 뜻의 ‘석주(昔珠)’라는 법호를 내렸다. ‘지혜를 밝히며 사는 훌륭한 수행자가 돼라’는 스승의 당부이기도 했다.

이 무렵 선학원에도 변화가 시작됐다. 전통불교 회복을 위해 수좌들을 지원하고 궁핍한 재정을 타계하기 위해 수덕사 만공 스님을 중심으로 재원을 출연해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을 설립한 상태였다. 석주 스님은 법인의 서기를 보며 선학원의 살림살이를 도맡았다.

석주 스님은 수행에도 매진했다. 1934년 참선수행을 결심한 석주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던 한암 스님을 찾았다. 한암 스님은 만공‧혜월‧수월 스님 등과 더불어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대표적인 전법제자였으며, 1941년 설립된 조선불교조계종의 초대종정으로 추대된 고승이었다. 석주 스님은 한암 스님으로부터 ‘마삼근’이라는 화두를 받고 면벽수행을 하며 하안거를 보냈다. 해제 후에는 한 달 더 상원사에 머물며 한암 스님으로부터 ‘범망경’을 배웠다. 이후에도 석주 스님은 선학원과 선원을 오가며 수행을 이어갔다.

1936년 4월 석주 스님은 은사 남전 스님의 입적에 크게 상심했다. 남전 스님은 친아버지 이상의 존재였다. 그런 스승을 잃은 제자는 한동안 방황했다. 그러나 스님은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금강산 마하연을 시작으로 덕숭산 정혜사, 묘향산 보현사 등 전국의 수행처를 찾아다니며 당대의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40년 9월 석주 스님은 부산 동래 금정선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 무렵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더욱 노골화 됐고, 불교계에도 왜색불교의 어두운 그림자가 승단 곳곳에 드리웠다. 스님들의 상당수는 결혼해 부인이 있었고, 일제의 황민화정책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선학원을 중심으로 민족불교를 수호하고 전통불교 회복 운동이 전개됐다. 1941년 2월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가 대표적이었다.

‘강석주의 삶에 나타난 민족불교’(김광식)에 따르면 유교법회는 청담‧운허 스님의 주도로 개최됐으며, 일제식민지 불교정책과 승려 세속화, 수행과 계율의 파탄 등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때문에 이 유교법회는 민족불교의 노선을 띠게 됐다. 비구 40여명이 참석한 유교법회에서는 만공‧동산 스님 등이 ‘범망경’ ‘유교경’ ‘조계종지’ 등을 주제로 설법을 했으며, 법회 직후에는 청정비구들의 모임인 ‘범행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석주 스님도 이 대회에 참가해 처음으로 청담 스님과 조우했다.

석주 스님은 당시 청담 스님을 떠올리며 “그분은 만나기만 하면 ‘참선을 하는 비구들은 어디 모자라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이 기막힌 풍토를 정화해야 합니다. 나는 이 한 벌 옷이라도 바쳐 설움 받는 참된 비구들의 자격회복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말씀하셨다”며 “기세등등했던 대처승들도 청담 스님과 정면충돌을 하면 기를 못폈다”고 회고했다.

이런 청담 스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스님은 불교혁신운동과 불교정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65호 / 2018년 11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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