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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김장의 미학

기자명 최원형

집집마다 다른 양념‧사연 버무려진 문화유산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면서
김장도 사라지는 세상이지만
가족들 모여 대화 나누다보면
노동의 고통보다 기쁨이 커

올해도 우리 집은 겨우내 일용할 김장을 무사히 마쳤다. 해마다 11월 말쯤에 언니네 식구들이 우리 집에 모여서 친정에 보낼 김치까지 세 집 김치를 담근다. 이렇게 김치를 내 손으로 담그기 시작한 지가 5년쯤 된 것 같다.

친정아버지가 편찮으시면서 언니와 나는 우리가 친정에 김장을 보내드리자고 의기투합했고 그렇게 시작된 일이 어느덧 연례행사가 됐다. 계기가 있기도 했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김치를 담그고 싶었다. 된장을 만들어 먹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는데 어느 순간 기본 찬거리를 만드는 방법을 다 까먹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되니 좋고 편한 세상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이 노릇이 과연 좋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때때로 하던 차였다.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 집의 고유한 맛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김장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내가 어머니의 김치 맛을 기억하듯 훗날 아이들이 기억할 맛을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어릴 적 몇 백 포기의 김장이 든 독을 땅에 묻고 무청이 내다걸리고 나면 눈이 내렸다. 겨울준비는 그보다 먼저 연탄 광이 가득 차도록 연탄을 들이고 집 안팎 청소를 말끔히 하는 게 시작이었다. 겨우내 지낼 연료와 먹을거리를 준비해두었으니 집안 살림을 하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 입장에선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곧장 마루에 있는 연탄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리시고는 작어서 못 입게 된 우리들의 스웨터를 푸셨다. 꼬불거리는 실은 주전자를 거치면 새 실이 돼 나왔다. 털실 뭉치가 바구니에 채워지면 우리를 불러 치수를 재고는 곧장 뜨개질을 시작하셨다. 내가 잠자리에 들 때도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고 계셨고 잠에서 깼을 때도 뜨개질을 하셨던 풍경이 떠오른다. 장갑, 모자, 목도리는 물론이고 스웨터며 바지까지 실과 바늘만으로 많은 입을 것들이 만들어지는 게 신기했다. 식구들의 몸 치수를 재고 옷을 뜨개질하는 동안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한 해가 다르게 부쩍 자라는 아이들의 몸을 대견하게 생각하셨을까? 아이들이 자라서 살아갈 세상을 상상하진 않으셨을까? 어머니만이 알고 계실 테다.

어쨌든 식구들의 몸에 맞는 옷을 만드는 동안 가족을 생각했을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돈이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 어머니가 떠 주신 옷에는 있었다. 그걸 입고 컸다는 걸 생각하니 뭉클하다.

하루는 지인 하나가 전화로 일을 부탁했는데 그날이 마침 우리 집 김장하는 날이었다. 사정을 얘기하자 그는 대뜸 김치를 뭐 하러 담가 먹느냐며 참 한가하다고 했다. 당시에는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한 마음에 그 얘길 가볍게 넘겼는데 김장 준비를 하면서 그 소리가 새롭게 살아났다. 김치 담그는 일을 왜 한가한 일이라 했을까 의아했다. 제대로 된 먹을거리 하나를 준비하는 동안 식구들이 좋아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무채를 썰고 속을 버무리는 일을 온 가족이 함께 하면서 그간 서운했던 것들이 치유되는 경험마저 하게 된다. 그러니 김장은 단순히 김치 담그는 것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다. 김치를 담근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고 그걸 계기로 식구들이 모여 맛있는 걸 나눠먹고 같은 일을 하며 온전히 하루를 함께 하는 일이다. 그러니 김장은 한가한 일도 아니고 고된 노동도 아니다.

반복적인 일을 하면서 1년치 묵은 이야기들이 다 함께 버무려진다. 올해는 텃밭을 하지 않아 내 손으로 키운 게 하나도 없었다. 대신 고마운 이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걸 느꼈다. 젓갈이 담긴 통을 열면서는 어부들의 노고를 생각했다. 폭염에도 뙤약볕을 등에 업은 채 고추밭을 돌봤을 어느 농부님을 생각했다. 속이 꽉 찬 배추며 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내 손으로 김장을 한다고는 하지만 모든 재료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손을 거쳐 내게 왔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집안에 마늘 냄새 고춧가루 냄새가 가득해도 우리는 내년에 또 모여서 맛나게 먹을 가족을 생각하며 지나간 서운함을 풀기도 하며 김치를 담글 것이다. 고립된 각각의 ‘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우리가 만든 김장으로 우리의 겨울은 든든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무형의 문화유산에 동참할 것을 안다.

김장이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걸 올해 김치를 담그다 알게 됐다. 수많은 이들의 손길로 키운 재료에 집집마다 다른 양념과 사연이 버무려지면서 단 하나도 같지 않은 맛이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김장’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66호 / 2018년 1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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