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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인문의 ‘나한문슬(羅漢捫蝨)’

기자명 김영욱

행복한 순간의 자유를 만끽하다

푸른 소나무 흐르는 시냇물
청량함과 시원함 한껏 선사
작은 행복에도 즐거운 스님

이인문 作 ‘나한문슬’, 18세기 후반, 종이에 먹과 엷은 채색, 41.5×30.8cm, 간송미술관 소장.
이인문 作 ‘나한문슬’, 18세기 후반, 종이에 먹과 엷은 채색, 41.5×30.8cm, 간송미술관 소장.

行年忽忽急如流(행년홀홀급여류)
老色看看日上頭(노색간간일상두)
只此一身非我有(지차일신비아유)
休休身外更何求(휴휴신외갱하구)

‘살아온 나이가 어느새 물결처럼 빨라져 늙은 빛이 이제 날마다 머리 위로 올라오네. 다만 이 한 몸도 내 소유가 아닐진대 그만두게나 이 몸 외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나.’

혜심(慧諶, 1178~1234)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게송(息心偈)’.

아마도 그림처럼 청량한 날이지 않았을까. 그 어느날, 한 선비가 조심스레 그림을 펼쳐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뒷맛 좋은 햇차를 마셨을 때처럼 그는 그림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붓을 든 그는 마지막 여운을 끌어 잡아 짧은 글로 옮겼다.

‘짙은 눈썹과 흰머리 아무 집착도 없다네(厖眉皓首無住著)’

조선 후기의 문신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은 자신의 눈과 마음에 복을 안겨준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의 작은 그림에 한 구절의 시로 답했다. 같은 나이인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던 그의 작품에는 솔숲에 앉아있는 한 승려가 그려져 있다. 검고 덥수룩한 수염을 한 중년의 승려가 웃옷을 벗어놓고 오른쪽 바지를 걷어 올려 엄지와 검지로 이를 잡고 있다. 쉬이 잡히지 않는 듯 승려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다. 그 사실적인 표현은 보는 이의 시선을 그늘진 솔숲 아래에 자리한 승려에게 향하도록 만든다. 이인문이 즐겨 그렸던 푸른 소나무는 졸졸 흐르는 시내와 더불어 승려에게 한껏 청량함과 시원함을 선사한다.

어쩌면 이 그림은 단순히 이인문 자신이 직접 본 행각승(行脚僧)의 모습을 화면에 담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인문의 그림을 감상한 홍의영은 화면 속에 그려진 이를 잡는 승려의 소탈한 모습에서 ‘방하착(放下著)’을 느꼈던 모양이다. 마음도, 욕망도, 집착도 내려놓는 무소유. 방하착, 그 마지막 여운을 남기기 위해 홍의영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시의 한 구절을 빌린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닌 행각승에게 더위를 식혀주는 자연의 시원함은 작은 행복이다. 그리고 다만 자신의 몸을 가렵게 하는 이를 잡는 것으로 행복한 순간의 자유를 만끽한다. 그는 작고 적은 행복으로 만족하는 ‘소욕지족(小慾知足)’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은 항상 무언가에 더 집착하고 크고 많은 행복을 갈망한다. 나아가 그것에 매료되어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세월은 쉼 없이 흘러감에도 오히려 순간의 집착과 욕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돌이켜보면 그저 한순간에 불과한 세월 앞에서 내 한 몸 가누기도 어려운 법이다. 덧없는 시간 속에서 내 몸 챙기기도 힘든데, 무엇을 더 얻어 두 손 가득 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466호 / 2018년 1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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