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서정주의 ‘푸르른 날’
90. 서정주의 ‘푸르른 날’
  • 김형중
  • 승인 2018.11.28 14:00
  • 호수 14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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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번뇌 없는 청정한 본래 마음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비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의 하늘
마음 청정무구해야 볼 수 있어
내게 소중한 사람 가까이 존재
그 사람이 나의 부처 나의 중생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그렇게 그리운 임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다. 사랑과 자비는 불성의 표현이다.

시인은 무명 번뇌가 한 점 없는 청정한 본래 마음자리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비유했다. 끝이 없어 한계가 없고 크기가 없이 마냥 푸른 가을하늘과 같은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은 허공처럼 텅 빈 마음자리이다. 공적(空寂)한 세계이다. 모양도 색깔도 크기도 없는데 기쁠 때는 마음이 파랗게 변하고, 슬플 때는 노랗게 변한다. 마음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이 세계는 유심소현(唯心所現)이다. 그래서 마음을 만물을 인식하고 주관하는 심왕(心王)이라고 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만 푸른 것이 아니라 마음도 티끌 한 점 없이 청정무구해야만 그런 하늘을 볼 수가 있다. 감각기관인 육근(六根)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육경(六境)이 함께 청정해야 육식의 의식작용이 바르게 이루어진다.

내 마음이 슬프고 괴로우면 푸른 하늘에도 귀신이 나타나는 법이다.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아무리 아름다운 꽃과 하늘을 봐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 때는 하늘이 깜깜했다. 푸른 가을하늘을 보고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누군가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죽은 목석같은 사람이다.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한 예쁜 소녀가 눈이 부시게 푸르른 가을날 도둑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운 사람은 예전에 좋은 인연이 있던 사람이다.

내게 소중한 사람은 가까운 곳에 있다. 그 사람이 나의 부처이고 나의 중생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행위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발현이다. 가을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는 금
방 임에게로 달려가고 싶다. 아픔이 그리움으로 퍼져가는 마음이 그를 위하여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미당(1915~2000)의 ‘푸르른 날’은 가장 많은 시인들의 마음을 울린 명품시이다. 하늘이 푸른 가을이 되면 시인들의 마음을 매혹시키고 격동의 경지로 몰고 가는 시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미운 곳까지도 사랑해야 진짜 사랑이다.

가수 송창식이 작곡하고 노래한 ‘푸르른 날’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에서 가장 노래가사로 알맞은 시 1위로 뽑혔다. 이 시는 설움과 함께 후련함을 동시에 준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서 단풍이 드는데”는 이 시의 절창이다. 어떻게 단풍을 표현하는데 “초록이 지쳐서 단풍이 드는데”라고 할 수 있는가? 시성(詩聖)이다.

엊그제 어린이대공원의 푸른 가을하늘 아래 은행나무 노란 단풍이 그렇게 고왔는데 간밤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만추(晩秋)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 순간에 쓸고 갔다. 가을이 낙엽과 함께 물러가고 있다.

김형중 동대부여고 교장·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466호 / 2018년 1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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