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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8·15·23대 총무원장 석주 스님-하

평생 역경‧포교‧인재양성에 헌신하며 불교현대화 견인

해방 이후 불교혁신총연맹 결성
급진개혁으로 사회주의자로 몰려
선학원에서 불교정화운동 착수

법보원 설립해 한글경전 법보시
종단 차원 동국역경원 설립 견인
1965년 칠보사 어린이법회 설립

종단위기마다 총무원장 등 맡아
1994년 땐 개혁회의 의장 맡기도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한국불교계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국불교계에 짙게 드리웠던 일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려는 혁신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 무렵 선학원에는 조명기, 정두석, 백석기, 장상봉, 곽서순 등 젊은 개혁가들이 불교계 친일청산과 불교혁신을 위한 제도 개선 등을 논의하고 있었다. 부산 범어사에서 해방을 맞은 석주 스님도 선학원에 합류했다. 스님은 이들과 매주 만나 불교혁신안을 연구하고 그 내용을 총무원에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 교단 집행부의 반응은 냉랭했다.

‘교단 개혁운동의 명암(김광식)’에 따르면 이 무렵 기존 교단집행부는 선리참구원 등 혁신단체들이 생각하는 개혁의 방향과 궤를 달리했다. 결혼한 스님을 승려로 볼 것인지 여부가 최대 쟁점이었다. 혁신단체들은 결혼하면 승려가 아니기에 신도로 신분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당시 집행부는 교단의 95%가 대처승인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이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양측의 입장은 좀처럼 좁혀들지 않았다. 결국 혁신단체는 독자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선리참구원을 비롯해 불교청년당, 조선불교혁신회, 조선불교학생동맹 등은 불교혁신총연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경봉 스님을 추대했으며, 신교단인 조선불교총본원을 설립해 독자적으로 불교혁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불교혁신총연맹이 추구한 혁신안은 정치적으로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적 이념으로 매도됐다. 특히 사찰토지에 대한 ‘무상몰수 무상분배’ 주장은 집행부로부터 불교혁신총연맹이 ‘빨갱이 단체’로 내몰리는 빌미가 됐다. 결국 불교혁신총연맹의 활동은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중도하차 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혁신총연맹 위원장이었던 경봉 스님은 양산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서울에 있었던 석주 스님도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3일간 고초를 받기도 했다. 비록 해방공간에서 석주 스님 등이 주도한 불교혁신총연맹의 활동은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중단됐지만, 이후 1950~60년대 불교정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토대가 됐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석주 스님은 불교정화에 뛰어들었다. 1953년 10월 선학원에서 효봉‧동산‧금오‧청담‧자운 스님 등과 불교정화운동을 위한 촉구 결의를 진행했고, 이듬해 5월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 발표 이후 대의‧종익‧재열‧정영 스님 등과 불교정화운동을 공식 발의했다. 그해 8월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도 참여해 교단 정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석주 스님은 불교정화 방식에 있어 ‘대처승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청담 스님 등 강경파의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교단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대처승을 일단 포용하고, 장기적으로 교육기관을 설립해 자질을 갖춘 스님들을 길러내는 게 보다 현실적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는 급진적인 개혁을 내세웠던 불교혁신총연맹의 실패가 가져다 준 교훈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석주 스님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때문에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이 심각한 대립 양상으로 치닫던 시기, 그 중심에서 한 발 물러서 있었다. 훗날 석주 스님은 “목소리가 큰 강경론이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불가피하게 적지 않은 상처를 수반해야 했던 정화운동이 시작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스님은 이 무렵부터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포교와 역경사업에 매진했다. 유독 관심을 뒀던 분야는 역경불사였다. 역경은 스님이 범어사 강원에서 수학하던 시절부터 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 여겼던 것이었다. 스님은 1949년 운허 스님과 함께 국문선학간행회를 설립하고 ‘선가구감’을 시작으로 1960년까지 ‘범망경’ ‘금강경’ ‘정토삼부경’ ‘사미율의요략’ ‘사분비구니계본’ ‘보현행원품’ ‘유마힐경’ 등을 차례로 간행했다. 1961년에는 운허 스님과 더불어 동국역경원의 전신인 법보원을 설립하고 역경불사에 몰두했다. ‘열반경’ ‘묘법연화경’ ‘육조단경’ ‘부모은중경’ ‘목련경’ ‘우란분경’ 등을 차례로 발간해 대중들에게 무상으로 법보시 했으며 최초로 ‘불교사전’을 발행하기도 했다. 법보원의 이 같은 성과는 1962년 출범한 통합종단조계종이 3대 핵심사업의 하나로 ‘역경’을 채택하도록 했으며 1964년 동국역경원을 출범시키는 배경이 됐다.

동국역경원이 출범한 이후에도 스님의 역경불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스님은 동국역경원 출범과 동시에 부원장을 맡았고, 1989년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 1995년 동국역경원 한글 팔만대장경 역경사업 후원회장 등을 차례로 맡아 역경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2001년 9월 318권의 한글대장경이 완간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석주 스님은 불교의 혁신을 위해서는 교육기관을 설립해 자질을 갖춘 스님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 인재양성 원력은 현대식 승려교육기관인 중앙승가대 설립으로 이어졌다. 1979년 중앙불교승가학원 개원식 장면. 출처=‘한국불교100년’(민족사)

석주 스님은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석주 큰스님과 교육불사’(김선근)에 따르면 석주 스님은 어린이청소년 포교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종단 차원에서 ‘어린이 포교’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던 1965년 3월, 스님은 칠보사에 어린이 법회를 창립했고, 같은 해 5월1일 ‘불교칠보어린이합창단’을 설립해 1967년 삼일당에서 예술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어린이에게 부처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지혜의 씨앗을 심어 자비의 싹을 틔우는 일과 같다”는 스님의 소신이 만든 결과였다. 석주 스님이 조계종 제8대 총무원장이었던 1972년 5월에는 어린이날을 맞아 “어른들은 말과 행실, 생각에서 어린이의 성장을 저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종단의 사부대중은 어린이날인 오늘만이 아니라 모든 날을 어린이를 돕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어린이를 위한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은 불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만큼 석주 스님의 어린이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스님은 청소년 교화를 위해서도 1965년 5월 대의‧운문 스님과 안병호 법사 등과 더불어 대한불교 청소년교화연합회의 전신인 ‘소년교화연합회’를 조직했다. 1970년 8월에는 청소년교화연합회 2대 총재로 선출돼 사찰 단위의 학생회 조직을 확대하고 중고등학교에 불교학생회가 창립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것 역시 “불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미래세대에 대한 포교가 대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스님의 원력이 만든 결과였다.

스님의 인재양성에 대한 열정은 1979년 중앙승가대 설립으로 이어졌고, 1980년 초대학장으로 취임해 중앙승가대가 현대식 승가교육기관으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다지도록 이끌었다. 이처럼 석주 스님은 조계종이 통합종단 출범 때부터 내세웠던 도제양성과 포교, 역경의 3대 사업을 홀로 실천해 왔던 셈이다. 그렇기에 스님은 출재가를 떠나 모든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종단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총무원장을 비롯해 감찰원장, 포교원장, 개혁회의 의장 등 종단의 중책에 추대되는 배경이 됐다. 그러나 석주 스님의 소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분열된 종단을 수습하고 대중화합의 초석을 세우면 곧바로 사임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선근 동국대 명예교수는 ‘석주 큰스님의 교육불사’에서 “종단이 어려울 때 참여해서 어느 정도 수습이 되면 바로 떠나시는 모습이 석주 큰스님의 도행이었다. 스님은 자신의 뜻에 의해서 지위에 집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공로에도 집착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실제 1971년 청담 스님의 입적으로 제8대 총무원장에 추대된 석주 스님은 이듬해 7월 제4대 종정으로 고암 스님이 선출되고, 종단이 안정을 되찾자 제30회 임시회를 앞두고 중앙종회에 총무원장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중앙종회는 종단의 안정을 위해서는 석주 스님이 적임자라며 이를 반려했다. 31회에 중앙종회에도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또 반려되자, 석주 스님은 제32회 임시회에서 “본인은 능력이 부족하니 종단을 위해 능력 있는 분을 모셔야 한다”며 “이번에도 반려되면 다시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중앙종회는 석주 스님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새 총무원장으로 경산 스님을 선출했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석주 스님은 조계종 감찰원장과 초대 포교원장 등을 맡아 종단 쇄신과 포교에 헌신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종단운영권을 두고 종정과 중앙종회가 대립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이어지자 대중들은 다시 석주 스님을 호출했다. 이 무렵 조계종 제5대 종정에 추대된 서옹 스님이 강력한 ‘종정중심제’를 추진하면서 중앙종회의 반발을 샀다. 급기야 1977년 10월 중앙종회가 해인사에서 종정추대취소를 결의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계종은 조계사 총무원과 개운사 총무원으로 양분됐다. 이 과정에서 원로들이 중심이 된 종단재건회의가 구성돼 중재에 나서는 한편, 종단재건회의는 종단수습을 위해 1978년 1월 제15대 총무원장으로 석주 스님을 추대했다. 그러나 석주 스님은 그해 2월 다시 사직했고 종단의 갈등은 한동안 지속됐다. ‘종정중심제’ ‘총무원장중심제’를 두고 조계사와 개운사 총무원으로 양분됐던 조계종은 1980년 월주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으로 수습됐다.

그러나 그해 10월27일 신군부에 의한 법난이 자행되고, 1983년 신흥사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종단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이 쏠리면서 조계종은 기존 집행부가 모두 사퇴한 가운데 비상종단을 출범시켰다. 비상종단은 1984년 1월23일 제23대 총무원장으로 석주 스님을 추대했다. 석주 스님은 이번에도 수차례에 걸쳐 고사했지만, 거듭된 요청에 결국 수락했다.

비상종단은 1년여의 논의 끝에 1984년 7월 ‘종단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신도법’ 등을 제정하고 종단 구성원을 기존의 4부대중(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에서 6부대중(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전법사‧전교)으로 바꾸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하는 종헌개정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종헌개정은 기존 종단운영 세력의 반발을 가져왔고, 당시 종정 성철 스님도 이 종헌개정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종정직 사퇴를 선언했다. 이 사태로 조계종은 극심한 혼란과 분규로 이어졌다. 결국 이 사태로 조계종 비상종단은 해산했고, 석주 스님도 8월1일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석주 스님은 이후에도 종단개혁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다. 1994년 조계종 개혁 때는 종단의 원로이자 개혁회의 의장으로 활동하며 종단개혁을 이끌었다.

이후 석주 스님은 봉은사, 칠보사 조실을 맡아 후학들을 이끌었으며 1997년에는 노인 복지를 위해 온양 보문사에 불교사회복지시설인 안양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앞장섰다. 그렇게 평생 인재양성과 포교, 역경불사에 매진하며 불교현대화를 견인한 석주 스님은 2004년 11월14일 세수 96세, 법랍 81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66호 / 2018년 1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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