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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켈라니야 라자마하위하라

하늘을 날아 세 번이나 오신 부처님, 자긍심이 빚어낸 고대사의 비밀

성도 첫 해에 랑카 방문한 붓다
부족 간 대립 중재하시고 법문
두 번째도 형제가 다툼 화해시켜
왕의 요청으로 켈라니야 방문
부처님 법좌 봉안해 대탑 세워

고대 서사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라마의 다리’에 담긴 진짜 의미
대륙의 시대에 대한 향수 아닐까

부처님께서는 재세시 세 번이나 하늘을 날아 스리랑카에 오셨다고 한다. 스리랑카 역사서의 이같은 기록은 섬나라가 갖고 있는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심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 추론의 합리성 여부를 떠나 글밭 사이사이에 녹아들어있는 신심을 먼저 살펴야 한다.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는 힌두교의 경전처럼 여겨지는 고전이다. 인도 코살라 왕국 라마왕자의 모험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에는 주인공 라마의 부인 시타를 납치하는 악마 ‘라와나’가 등장한다. 라와나는 랑카, 즉 지금의 스리랑카를 지배하는 마왕이다. 라마왕자를 도와 라와나에게 납치된 시타를 구한 1등 공신은 원숭이의 신 하누만이었다. 바람의 신에 아들인 하누만은 하늘을 날아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라마왕자와 그의 군대가 라와나의 섬 랑카로 가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했다. 하누만은 히말라야에서 바위와 돌들을 가져와 인도의 해안가에서부터 랑카까지 연결되는 다리를 만들었다. 하누만이 만든 다리를 이용해 라마와 그의 군대는 랑카로 진격해 라와나를 물리치고 시타를 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영웅이 된 하누만은 지금도 인도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신의 하나다. 중국에서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의 모델이 되었다. 그의 활약상이 입에서 입으로 오랜세월 회자되었음이다. 하누만의 이야기는 신화가 되었고 그가 만든 다리 또한 신화 속 전설이 되었다. 1994년 미국 휴스턴에서 발사된 우주왕복선 인데버호가 인도양을 정밀 촬영하던 중 인도와 스리랑카를 이어주는 다리 형태의 해저지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도 남부 팜반 섬과 스리랑카 북부 마나르 섬 사이 42km에 걸쳐 섬과 산호, 바위들로 연결돼 있어 마치 징검다리처럼 보이는 해저지형은 해수면 아래 불과 1~2m 남짓한 깊이에 자리하고 있다. 후에 인도고고학연구소는 조수의 퇴적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사주라고 결론 내렸지만 ‘라마의 다리’ 혹은 ‘아담의 다리’로 불리는 이 해저지형은 하누만이 다리를 만들었다는 ‘라마야나’의 이야기가 그저 허무맹랑한 상상만은 아닐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라마야나’가 집필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시인 발미키에 의해서지만 이미 십수 세기에 걸쳐 구전돼 오던 인도의 설화를 집대성한 것이라는 점과 고대 인도양의 해수면이 지금보다 더 낮았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누만이 태어나고 영웅 라마의 활약상이 상상력을 만나 전설로 빚어지던 시대, 까마득한 고대의 어느 때 즈음 스리랑카는 인도와 연결돼 있는 육지였을지도 모른다.
 

부처님의 첫 스리랑카 방문. 선주민들은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갑자기 고대의 서사시까지 끌어들이며 인도와 스리랑카의 육로연결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이유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재세시에 세 번이나 이 섬을 방문하셨다는 기록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하늘을 날아 스리랑카로 오셨다고 한다. 후일 아쇼카왕의 전법사였던 마힌다 스님 또한 ‘새들의 왕’처럼 하늘을 날아오셨다고 한다. 이는 스리랑카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디파왐사(Dipavamsa)’에 전해지고 있다.

부처님의 첫 스리랑카 방문은 성도하신지 9개월 되던 무렵에 이루어졌다. 당시 스리랑카에 살던 선주민 야카족과 나가족 사이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이들을 제도하기 위해서였다. 야카족과 나가족은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마왕 라와나와 그의 동생 비부샤나의 후손이었다. 고대 인도의 전설, 힌두교의 신화가 스리랑카에서는 부처님의 행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만큼 스며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아있는 역사의 기록은 이렇다.

홀로 스리랑카 중부 마히양가나에 당도하신 부처님은 온몸에서 빛을 뿜어내며 명상에 드셨다. 이 모습을 본 야카족과 나가족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부처님은 그들을 안심시키며 설법을 통해 제도하려 하셨다. 하지만 정법에 무지했던 그들은 법문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방편이 필요했다. 극심한 가뭄과 천둥, 폭우 등을 자유자재로 일으켰다. 온몸에서 빛을 뿜어내고,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이 낯선 인물이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임을 깨달은 선주민들은 마침내 부처님께 조복했다. 이들의 모습을 보신 부처님은 야카족과 나가족의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서로 화합하도록 훈계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야카족 수장이던 수마나 사만은 불법의 수호자이자 스리랑카의 수호신이 될 것을 다짐하고 섬에서 물러났다. 사만은 지금까지도 스리랑카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부처님께 귀의한 사만은 “부처님이 안 계실 때에도 귀의할 수 있도록 증표를 달라” 부탁했다. 부처님께서는 사만에게 머리카락 한 움큼을 뽑아주셨다. 사만은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봉안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당도하신 마히양가나에 탑을 세웠다. 마히양가나대탑 혹은 미유구나세야로 불리는 이 탑은 스리랑카 최초의 불탑으로 기록돼 있다. 마히양가나는 지금까지도 스리랑카의 가장 대표적인 성지로 여겨진다.
 

왕좌를 둘러싸고 벌어진 형제간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두 번째로 스리랑카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그로부터 5년 후 부처님께서 다시 스리랑카를 찾으신다. 이번엔 최북단 나가디파 푸라나지역이었다. 야카족이 물러난 후 섬을 지배하던 나가족의 마호다라와 추호다라 형제 사이에 왕좌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 이들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내신 부처님은 이번에도 설법을 통해 화합의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부처님의 법문에 감명 받은 형제는 다툼을 참회하는 뜻에서 왕좌였던 황금의자를 부처님께 보시했다. 이 두 번째 방문을 기념해 나가디파 푸라나에는 사원이 세워졌다. 사원에는 마호다라와 추호다라 형제가 부처님께 귀의하는 장면이 벽화로 기록됐다.

세 번째 방문은 성도 후 8년이 되던 해다. 역사서 ‘디파왐사’와 ‘마하왐사’는 이 세 번째 방문을 특히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이 모습을 나투신 곳은 콜롬보에서 10km 가량 떨어진 켈라니야였다. 당시 이 지역은 나가족의 왕 마니악키카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 친견하기를 간절히 발원했고 이러한 왕의 뜻을 살피신 부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스리랑카를 방문하신 것이다. 앞서 두 번의 방문이 분쟁의 조정을 위한 자발적 현신이었다면 세 번째 방문은 국왕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매우 공식적인 방문이었던 셈이다. 부처님께서는 도착하신 후 켈라니야강에서 목욕을 하고 법문을 하셨다. 왕실과 귀족 백성들까지 모여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부처님을 청한 마니악키카왕은 흰 법좌를 준비해 부처님을 모셨다. 이후 부처님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켈라니야사원으로도 불리는 라자마하위하라가 세워졌다.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법좌는 사원 안 거대한 다고바에 봉안됐다. 사원의 이름 ‘라자마하위하라’는 왕의 대사원이라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직접 오셨던 특별한 장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디파왐사’와 ‘마하왐사’의 기록에 미루어보면 사원이 건립된 시기는 부처님 재세시,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이다. 하지만 사원은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수차례 파괴되고 복원되기를 반복했다. 특히 16세기 포르투갈의 침략시기에 기독교도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된 것을 19세기에 이르러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원 내부를 장엄하고 있는 벽화 또한 이때 조성된 것이다. 벽화에서는 세 차례에 걸친 부처님의 스리랑카 방문을 모두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국왕의 간절한 요청으로 또 다시 스리랑카에 몸을 나투신 부처님은 100여명의 제자들과 함께 켈라니야에 도착하셨다.

승단이 형성되어 불교가 정착된 것은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스님의 전법에 의해서다. 재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부처님께서 세 번이나 이 섬을 방문하셨다는 기록, 그리고 그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들은 부처님 재세시인 기원전 7세기 이미 이 섬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특별한 땅이라는 자부심이 진득하게 녹아있다.

이제, 한 번쯤 상상해도 된다. 육지와 단절된 섬나라 스리랑카로서는 라마왕자로부터 석가모니부처님, 그리고 마힌다 스님에 이르기까지 이 위대한 성인들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실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원숭이 신이 만든 다리를 이용하거나 직접 하늘을 날아왔다는 기록은 당시의 역사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 추론이었을 터다.

하지만 ‘라마야나’ 속 하누만의 이야기에서부터 세 번에 걸친 부처님의 스리랑카 방문 등 전설로만 여겨지는 이 이야기가 오직 상상의 산물이었을까. 스리랑카와 인도가 연결돼 있었다면, 섬나라가 아니라 ‘라마의 다리’로 이어져있던 인도대륙의 최남단이던 시절이 진짜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이 같은 전설들은 섬나라 스리랑카가 아닌, 대륙의 시대에 대한 DNA 속 기억이 신심과 만나 빚어낸 향수일지도 모른다. 전설의 상당수는 역사 속 사실에 대한 후대인들의 향수와 찬탄, 그리고 바람이 엉겨 붙어 탄생하지 않는가. 역사가들이 진짜 전하고 싶었던 말 또한 스리랑카가 고대의 문화와 불교사의 중요한 축이었다는 증언, 그 자긍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작은 섬이 갖고 있는 이 방대한 역사의 기록, 그 기록의 문장들 사이사이에 켜켜이 쌓여있는 신심의 원동력이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보물섬 스리랑카, 그들의 역사가 유독 빛나는 이유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67호 / 2018년 1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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