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다빈치의 과학정신
93. 다빈치의 과학정신
  • 김정빈
  • 승인 2018.12.05 10:47
  • 호수 14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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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없는 종교는 맹목, 종교없는 과학은 외발”

네이처지 과학자 대상 설문 조사
르네상스적 천재 부문 1위에 올라
토목건축가, 기획자, 기계공학자
과학과 예술 결합 내지 조화시켜
끝없이 실험해 이론 검증에 최선
그림=근호
그림=근호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박물관에는 연간 800만명 가량의 관람자가 입장하며, 그중 400만 명이 ‘모나리자’를 감상한다고 한다. 이 유명한 그림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L. Da Vinci : 1452~1519)는 르네상스기만이 아니라 인류사 전체를 통해서 보더라도 가장 위대한 천재 중의 한 사람이다.

십여 년 전에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가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인류사를 통틀어 르네상스적 천재에 관한 설문을 한 적이 있다. 결과를 보면 1위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였고, 2위는 셰익스피어, 3위는 괴테였으며, 과학자로는 뉴턴이 5위, 아인슈타인이 10위를 차지했다.

필자는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문학예술가 두 사람이 상위권에 올라서고, 천재의 대명사처럼 거론되는 아인슈타인이 10위로 처진 것에 놀랐다. 설문에 응한 과학자들이 자신과는 다른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천재들을 선망하는 마음을 가졌거나 질문이 ‘르네상스적 천재’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다빈치가 르네상스적 천재 1위로 선정된 데에는 필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인슈타인이 20세기 천재의 대명사라면 다빈치는 인류사 전체를 대표하는 천재의 대명사이다. 또 다른 천재의 대명사 격인 인물이 모차르트이지만 그는 음악의 천재일 뿐 르네상스적 천재는 아니었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잊힐 수 없는 이 찬란한 별은 어린 시절에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지인 피렌체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 견습생으로서 회화와 조각을 배웠다. 1482년에 그는 밀라노로 옮겨갔는데, 보다 더 경험적이고 현실적이며 학구적인 밀라노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밀라노 대공의 그를 초청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빈치는 대공의 전속화, 토목기사, 궁정연회 기획자로, 나아가 토목, 건축 및 군사 문제의 기술고문이자 수력과 기계에 대해 연구하는 공학자로서 살았다. 그는 밀라노에서 17년간 머물렀는데, 화가로 알려진 그가 그동안에 그린 회화는 6점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회화가 아닌 다른 여러 분야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다빈치가 그린 회회작품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불과 수십 점에 불과하다. 그의 회화 중에는 미완성인 것들이 많은데, 그것은 호기심이 많은 그가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분야로 관심을 옮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라노 시절에 그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미술 분야를 위해 천만다행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예술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상을 경험적, 분석적, 합리적으로 관찰하는 과학자였다. 그가 연구하여 논문을 쓴 분야는 회화, 건축, 기계학 원리, 인체 해부 등 다양하다. 그는 관념적인 지식을 경멸하고, 체험을 통해 직접 보고 터득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존중했다. 그 정신에 입각하여 그는 수천 장의 노트, 스케치, 메모를 작성했다.

그가 밀라노에 머물던 시절, 대공은 자신의 가문을 세운 프란체스코 스포르자를 기념하는 청동 기마상을 세우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다빈치는 그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높이가 5m나 되는 거대한 점토원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전쟁이 임박해오자 동상을 만들기로 한 청동이 대포를 만드는 데로 전용되어 애써 만든 점토원형이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만일 그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졌더라면 조각사는 달리 쓰였을 것이다. 회화에서 그를 대표하는 작품인 ‘모나리자’의 신비스러움과 ‘최후의 만찬’에서 볼 수 있는 조직적이고 다채로운 표정 및 행동 모습을 결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거대한 조각상을 볼 수 있었더라면! 하지만 작품이 제작되지 못한 것은 물론 역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가장 기념비적인 조각작품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만일 그것이 남아 있더라면 지금이라도 청동상을 주조해낼 수 있는 점토원형 또한 전쟁의 포화를 맞아 파괴되어버렸다.

1503년, 그는 피렌체인들의 초청을 받아 운하를 만드는 사업의 전문위원이 되어 아르노강둑의 개관도를 그리고 지형을 측정하여 뱃길 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계획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피렌체인들은 그의 안을 실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그의 그 계획은 후대인들에 의해 그대로 실현되었으니, 이는 남아 있는 점토원형으로 본떠서 청동조각 작품을 완성한 셈이라고 할 것이다.

같은 해에 그는 피렌체의 베키오궁에 있는 ‘500홀’의 벽에 그림을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가 그릴 벽면은 가로 17m, 세로 7m나 되었는데, 이는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벽면보다 두 배나 더 큰 것이다. 그는 ‘앙기아리 전투’라는 작품을 구상하여 제작에 매달렸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19년 5월2일에 클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메모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 5천여 장에 이르며, 더하여 그는 인체 해부, 기계공학, 수력학, 축성, 비상(비행기) 등에 관한 스케치도 200여장을 남겼다. 그는 물건을 들어 올리고 이동하는 장치, 관개용 배수장치, 병기, 자동인형 등을 구상했다. 새를 그리기 위해 공기의 무게와 밀도의 관계를 밝히고자 하였고, 풍압이 날개에 미치는 힘의 영향을 탐구했으며, 오늘날의 낙하산과 유사한 장치를 고안했다.

그는 “상상만으로 자연과 인간 사이의 통역자가 되려고 하는 예술가들을 믿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였지만 ‘실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로써 이론을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과학과 예술을 결합 내지 조화시킨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치열한 과학정신을 보며 우리는 생각한다. 오늘 우리 불교인들에게는 첨단과학 시대에 걸맞은 엄정하고 치열한 과학정신이 있는가. 물론 불교는 종교이고, 종교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지식의 판관으로 등극한 과학은 실험과 검증으로써 증명된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종교적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현시대가 ‘상상만으로 종교적 진실을 말하는’ 경우를 비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에게 그런 부분은 혹 없는가. 우리는 지금 자연과학적 진실에 부합하는 종교적 교리를 믿고 있는가. 물론 종교는 과학이 답하지 않는 이고득락의 문제에 대해 답하는, 과학과는 또 다른 영역의 인간활동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려와 우리는 결론짓는다. “과학 없는 종교는 맹목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외발이다”라고.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67호 / 2018년 1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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