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⑫
42.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⑫
  • 최병헌
  • 승인 2018.12.05 14:14
  • 호수 14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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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사용은 지배체제 정비와 고대문화 발전에 획 그은 사건

신라에서 한자의 사용은
유교·불교·율령반포 전제

고구려에 비해 150년 늦은
500년대 초 한자사용 확인

초기엔 한문과 이두문 혼용
진흥왕 때 유교지식인 등장

정변으로 왕위 오른 지증왕
국호 ‘신라’, 왕호로 ‘왕’ 확정

법흥왕은 율령과 복식 반포
6부도 행정구획으로 변모

부족장들 군대 보유 금지
왕의 군대로 완전히 변모

초월적 왕권 위상 수립 후
통합 사상으로 불교 공인
국보 33호 창령 신라진흥왕척경비.
국보 198호 단양 신라적성비.

동아시아문화권의 공통적인 요소로서는 한자와 유교, 율령제, 불교 등이 거론되어 왔다. 이러한 요소들은 중국에서 성립되어 한국·일본·베트남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에서는 3국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수용되어 국가체제 정비와 지배이념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가장 선진적인 고구려에서는 일찍이 소수림왕 2년(372) 불교를 수용하고, 동시에 태학을 설립하였으며, 그 다음해(373)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동시에 수용하였다. 불교가 국가의 정신적 통일을 뒷받침한 것이라면, 태학은 한문과 유교경전의 교육을 통한 새로운 관료체계의 수립을 위한 것이고, 율령의 반포는 국가체제 그 자체의 정비를 뜻하는 것이다. 3국 가운데 가장 후진적인 신라에서는 고구려보다 150여년이나 늦어진 22대 지증마립간대(500〜514)부터 23대 법흥왕대(514〜540)에 비로소 수용되었는데, 율령 반포는 법흥왕 7년(520), 불교 공인은 법흥왕 14년(527)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자는 지증마립간 원년(500)의 포항중성리비, 4년(503)의 포항냉수리비, 법흥왕 11년(524)의 울진봉평비 등 3비를 비롯한 금석문들의 발견으로 500년대 초부터 사용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한자의 사용은 유교·불교·율령제 수용의 전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배체제의 원활한 운용을 가능케 하였다. 위에 들은 3비가 행정문서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며, 약간 늦은 진흥왕대(540〜576)의 단양적성비·진흥왕순수비 등이 포고문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물론 당시 일반적인 행정문서 등에는 목간(木簡)이 주로 사용되었을 것이나, 비석 같은 금석문으로 새긴 것은 특히 오래 남기려는 뜻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문장은 순수한 한문식(漢文式)이 아니고, 신라식의 이두문(吏頭文)과 한문이 혼용되었고, 한자의 순서가 한문식이 아니고 우리말의 순서로 이루어진 미숙한 형태이기는 하였지만, 한자의 사용은 지배체제의 정비와 고대문화의 발전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문자사용 이전 청동기나 바위에 남긴 다양한 형태의 문양들과 비교할 때, 그리고 ‘양서(梁書)’ 신라전에서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았다(刻木爲信)’고 하는 기록과 비교할 때 커다란 변화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신라에서 한문과 유교를 교육하는 학교가 설립된 것은 한참 뒤인 신문왕 2년(682)이었지만, 일찍이 법흥왕 11년의 울진봉평비, 진흥왕 11년(550) 즈음의 단양적성비, 진흥왕 22년(561)의 창령진흥왕척경비 등의 각 비문을 작성한 사람으로서 “서인(書人)”이라는 직책의 비문 작성자들의 이름들을 남겨주고 있었던 것을 보아 당시 한문을 이해하는 전문적인 지식인들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진흥왕 6년(545) ‘국사(國史)’의 편찬을 담당하였던 문사(文士)들과 진흥왕 29년(568) 유교의 천명사상이나 왕도사상을 표방한 진흥왕순수비문의 찬술자 같은 유교적인 지식인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한편 법흥왕 7년(520) 반포한 율령에는 율(律)과 령(令)의 다양한 편목을 갖추어 17관등, 백관의 공복, 골품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규정과 형법과 같은 구체적인 처벌조항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6부 체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켜 연맹왕국의 과도기적인 단계를 벗어나 중앙집권적인 고대왕국으로의 전환의 기반을 구축케 하였다. 원래 연맹왕국의 초기 단계에서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기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법률로써 만족하고 있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선(善)이라 하고, 그것에 위반되는 것은 악(惡)이라고 생각하여 처벌하였으며, 범죄의 정도 차이에 따른 처벌의 등급에는 소홀하였다. 구체적인 사실로서 고조선에서는 8조목, 부여에서는 4조목의 법률이 통용되고 있었는데, 살인·상해·절도·간음·투기 등의 죄목에 대한 처벌이 공통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고구려·삼한·옥저·동예 등에서도 앞의 두 나라의 것과 비슷한 규정들이 있었다. 그러나 4 6세기 철기문화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발달과 소유의 불평등 심화는 다양한 형태의 분쟁을 야기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지배 권력의 강화와 처벌규정의 세분화가 이루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라 최고(最古)의 3비는 모두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에 중앙정부가 개입하여 해결하는 과정과 그 처리결과를 기록한 공문서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즉 어느 지역에 어떤 사안이 일어나자 중앙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접수해서 6부의 대표들이 모여 논의를 진행하고, 거기에서 어떤 최종적 결론을 내려 집행한 사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일체를 마무리 짓고 비문을 작성한 사실 등을 돌에 새겨 둠으로써 뒤에 오래 남아 비슷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결국 분쟁 해결과 비석의 수립을 통하여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켜 갔던 것이며, 법률 규정도 세분화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연맹왕국 시기의 지배체제는 원래 6부 각각 독자적인 정치공동체로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으며, 국가의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는 회의체를 구성하고, 각부의 대표가 참여하여 결정하고 집행하는 등 6부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지배체제였다. 그런데 지증마립간 즉위(500) 이후 그러한 6부 공동의 지배체제는 변모해서 각부의 단위 정치체로서의 독자성이 점점 약화되면서 왕경의 행정구획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하여 출신 소속의 부보다 관등이 더 중시되고, 중앙관제와 지방통치체제가 정비되어 갔다. 사탁부 소속의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은 소지왕 말년에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4년(503) 국호를 ‘신라(新羅)’, 왕호를 중국식의 ‘왕(王)’으로 확정하고 왕 이외의 6부 대표들은 아무도 왕을 칭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를 전후하여 3년(502)에 순장(殉葬)을 금하고, 5년(504)에는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여 전통적인 장례의식을 혁파하였다. 6년(505)에는 주군제(州郡制)를 시행하여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다. 그보다 앞서 3년(502)에 각주의 군주(郡主)에게 명하여 농사를 장려케 하고 소를 밭 가는데 사용케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503년 이전에 지방관으로 도사(道使)가 파견되었음을 확인해주는 냉수리비의 기록에 의해 군주나 도사 등의 지방관이 이미 파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505년 주군제의 시행으로 주(州)-군(郡)-성(城)으로 지방행정체계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였으며, 주에는 군주(軍主), 군에는 당주(幢主), 성(촌)에는 도사가 파견되었다. 또한 15년(514)년에는 아시촌(阿尸村, 安康?)에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왕경의 6부와 남쪽의 사람들을 이주시켰는데, 삼국통일 뒤에는 5소경으로 확대 정비되었다.

왕권의 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는 다음의 법흥왕대에 더욱 가속화되어 즉위 4년(517)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는데, 중앙관부의 설치로는 최초였다. 원래 왕경의 6부와 지방의 52성에는 법당(法幢)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특히 6부는 독립적인 정치단위로서 각자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6부가 독립적인 정치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단순한 행정구획으로 변모하게 됨에 따라 6부의 군대도 통합되어 국왕의 지휘 하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을 통할하는 관부로서 병부가 가장 앞서 설치되었다. 이제 국왕은 한 부대의 지휘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6부 군대 전부의 지휘관, 나아가 전국적인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실제 국왕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뒤에 주를 단위로 설치된 6정(停)이 삼국시대 중추적인 군단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부족적인 전통을 이어 내려왔다고 생각되는 6정은 왕경의 진골 출신의 장군이 그 지휘관이 되었다.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를 통하여 군권을 장악한 뒤 법흥왕 7년(520) 드디어 국가체제 정비와 왕권 강화의 근간이 되는 율령과 백관의 공복제를 반포할 수 있었다. 이로써 관등과 관직의 제도가 정비되기에 이르렀으며, 이제 각부는 독립적인 정치단위로서의 위상과 기능을 크게 상실하고 왕경의 단순한 행정구획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법흥왕은 이렇게 대내적으로 정비된 지배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국제적인 외교와 대외적인 진출을 시도하였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한 다음해(521)에 남조 왕조인 양(梁)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의 사신을 따라간 것이었다. 백제는 개로왕 21년(475)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의 부흥에 성공하여 무령왕 21년(521) 11월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12월 양은 사신을 보내서 무령왕을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했다. 앞서 17대 나물마립간 26년(381) 북조 왕조인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는 고구려의 사신을 따라간 것이었다. 나물마립간 때의 사신 위두(衛頭)가 호불왕으로 유명한 부견(苻堅)을 만나서 나눈 대화 내용이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 인용한 ‘진서(秦書)’와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으나, 이후 전진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150년 뒤인 법흥왕 8년 양에 사신을 처음으로 파견하게 되었는데, 그 때 양의 황제는 보살황제로 불려지던 무제(武帝)였다. 양무제는 그의 답례로 원표(元表)라는 승려를 보내왔는데, 승려인 원표가 사신으로 온 것이 신라에서 불교 공인의 문제를 공론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법흥왕 9년(522)에는 대가야왕 이뇌왕(異腦王)의 청혼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 최치원의 釋順應傳에는 比枝背)의 딸을 시집보냈고, 2년 뒤에는 법흥왕이 남쪽 국경지역을 순행하면서 가야국왕과 만남으로써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텄다. 그리고 법흥왕 12년(525)에는 사벌주(沙伐州, 상주)에 군주를 파견하여 북쪽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대내·대외적으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일단 마련하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는 초부족정신의 수립과 초월적인 왕권의 위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체계로서 불교를 공인하는 문제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67호 / 2018년 1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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