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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분홍시절

기자명 임연숙

맑은 봄날의 순수함을 닮은 소녀

터럭 한 올까지도 묘사하는
동양화에 현대적 기법 녹여
‘소녀’ 시리즈로 추억 선물

백지혜 作 ‘분홍시절’(부분), 90×195cm, 비단에 채색, 2018년.
백지혜 作 ‘분홍시절’(부분), 90×195cm, 비단에 채색, 2018년.

얇은 종이 한 장 한 장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듯, 하루하루가 쌓여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는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계절이다. 책처럼 지혜와 깨달음도 더 커지면 좋으련만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더 지혜롭거나 저절로 깊이가 생긴다거나 현명해 지는 건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드는 것과 현명해 지는 것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느끼고 깨달아야 지혜와 현명함이 생기는 것 같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마음을 닦는 일처럼 작가는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신을 단련시키며 깊어져 간다. 백지혜 작가의 작품을 긴 시간 헤아려 보면 늘 한결같은 맑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 거기에 더해 좀 더 화면은 노련한 작가의 붓질을 느끼게 한다.

동양에서의 인물화는 대상을 미화시키거나 예쁜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참된 내면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외면의 닮고 닮지 않음이 아닌 내면의 정신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좀 더 대상에 집중하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전통 초상화론에 의거한 기법연구와 이를 현대적 어법으로 녹여내려는 작가들의 등장으로 미인도라고 불리던 인물화에 대한 새로운 한국적 인물화의 형식을 만들어 냈다. 거기에 대중적 인기와 팬층을 갖고 있는 작가가 백지혜다.

얼마 전 끝난 전시에서 작가는 비단 위에 전통 채색기법으로 표현한 소녀의 모습을 시리즈로 보여주었다. 지난 개인전 ‘어떤 시절’은 그동안 백 작가가 꾸준히 그려온 어린아이, 그중에서 여자 어린아이가 주제다. 모델이 된 아이가 점점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소설처럼 성장 그림이 된 듯싶다. ‘어떤 시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4세에서 9세까지의 실제 아이들을 모델로 등신대로 제작되었다. 어린 모델을 통해 작가의 어떤 시절, 관람자의 어떤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아직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아직 꽃이 피지도 않은 시기의 어떤 날들을 떠올리면 작가는 부모님 댁 마당의 작약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도 작약 꽃이 피는 과정과 소녀를 함께 표현하기도 하였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집착하는 분홍의 이미지에 어떤 의미를 담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일반적인 현상을 담담하게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적절한 거리를 두고 표현하고 있다.

비단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다른 어떤 기법보다도 과정이 까다롭고 조심스럽다. 성장통을 겪기 전, 순수하게 맑고 깨끗하며 짧은 봄날의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결이 고운 비단 위에 아교포수를 바르고, 때로는 뒤에서 채색하여 앞에서 좀 더 섬세하게 느껴지게 하고 있다. 배경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으면서 오롯이 인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는 세필과 물감을 바르는 붓을 번갈아 가며 사용해 분홍과 사랑에 빠진 어린아이의 표정과 얇은 쉬폰드레스를 꼭 쥐고 있는 아이의 손과 포즈가 자연스럽다.

늘 같은 날들이지만 매일 매일이 다른 느낌과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똑같을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지난 1년의 시간이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은 소녀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에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예술교육 팀장 curator@sejongpac.or.kr

 

[1467호 / 2018년 12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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