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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자현 스님

근본분열은 다양성 촉진…이론화 반작용은 대승불교 출연 원동력

붓다 입멸 후 동·서로 교단 확장
불적·사리탑 집중된 동방교단 비해
전래지 서방교단이 더 보수적 성격
교주 없는 대제자 중심 수행도
불멸 100여년 근본분열의 요인

아쇼카 이후 20여 부파로 지말분열
교리 세분 이론화되며 민중과 괴리
대승불교는 붓다에 대한 그리움과
쉬운 불교 요구에 대한 불교의 화답

자현 스님은 저서 ‘불교사 100장면’ 출간 기념 특별강연회에서 2시간여에 걸쳐 대승불교 출연까지의 불교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자현 스님은 저서 ‘불교사 100장면’ 출간 기념 특별강연회에서 2시간여에 걸쳐 대승불교 출연까지의 불교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2500여년 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쿠시나가르에서 입멸하신 후 제자들은 왕사성 인근 칠엽굴에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합니다. 이를 불교사에서는 1차 결집이라고 합니다. 결집을 주도한 인물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두타제일로 불렸던 마하가섭존자였습니다.

십대제자 가운데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존자와 가섭 삼형제(우리빈라가섭, 나제가섭, 가야가섭) 등은 모두 왕사성과 그 인근지역 출신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아난존자와 가전연, 아나율, 라훌라 존자 등은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 출신이었습니다. 즉 교단은 마하가섭을 중심으로 하는 왕사성파와 아난존자를 중심으로 하는 석가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하가섭존자 중심의 1차 결집은 부처님 입멸 후 교단의 무게 중심이 왕사성파로 기울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상대적으로 교단의 중심에서 멀어진 아난, 부루나, 가전연 존자 등은 왕사성 중심의 동부지역에 비해 불교의 교세가 약했던 인도 서부지역의 전법활동에 주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교단의 활동지역은 서쪽으로 확대되고 불교의 가르침은 더욱 넓은 지역으로 전파돼 나갑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교단의 분열이 표면화되지는 않습니다. 분열은 엄청난 교리의 차이가 아닌 사소한 견해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 시점이 바로 붓다 입멸 후 100여년 무렵입니다. 부처님의 직계 제자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직접 들었다”고 하면 더 이상 이견이 제기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붓다 입멸 후 100여년이 지나자 그렇게 판단해 줄 수 있는 제자가 더 이상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붓다 입멸 후 100여년에 이르러 동방교단과 서방교단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인도와 같이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존재하는 지역에 하나의 율을 획일적으로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서방교단의 비구 야사가 동방교단에서 행해지는 10가지 관행에 대해 비판한 사건입니다. 이것을 ‘야사의 10사’라고 합니다. 스님들이 소금을 소유하는 것, 음식에 소금을 넣어서 감미해 먹는 것, 음식이 아닌 금이나 은, 즉 화폐로 탁발 받는 것 등 일상의 문제를 놓고 율장에 위배 되는가를 거론하게 됩니다. 이를 동방교단에서는 관행으로 허용하고 있었지만 서방에서 온 야사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율장의 원칙에서 보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붓다 입멸 후 100여년이 지나 사회는 변하고 있었습니다. 동방교단의 관행은 이런 변화에 따른 현상이었습니다. 야사는 동방교단에서 목격한 10가지 문제를 서방교단의 장로에게 알렸습니다. 이를 놓고 동방과 서방의 장로 8명이 모여 토론합니다. 결론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습니다. 원칙을 중시하던 교단의 연로한 장로들은 동방교단의 관행을 비법으로 규정합니다. 그러자 동방교단, 특히 비교적 젊은 스님들 사이에서 이 같은 결론에 승복하지 못하고 반발하며 별도의 교단을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교단 최초의 분열인 근본분열이며 대중부의 출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불교탄생의 중심지였던 동방교단에 비해 전파지였던 서방교단이 더 보수적인 성격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본류인 동방교단이 더 보수적이고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파지역은 원류가 아니라는 한계 때문에 정해진 원칙을 쉽게 바꾸지 못하곤 합니다. 그에 비해 정통을 계승하고 있는 집단은 훨씬 더 빠르고 자유롭게 변합니다. 한국사람은 문법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전래된 언어인 영어는 정확한 문법에 맞춰 사용하려는 태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불교가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요인들이 있었습니다.

교단 내적인으로는 붓다 입멸 후 특정한 교주가 존재하지 않은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언어의 다양성, 그리고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연성(중도주의)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또 초기부터 지혜제일, 두타제일과 같이 각기 특장기를 갖고 있는 대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룹수행이 행해졌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인간은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단일 체계로 모든 사람을 통일할 수 없다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도록 했던 불교의 특징이 붓다 입멸 후 100여년만에 근본분열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근본분열이 이루어진 교단은 아쇼카왕 시대를 거치고 다시 20여개 부파로 쪼개지는 지말분열을 일으키며 부파불교의 시대로 나아갑니다. 이때 서부지역은 보수적인 견해를 고수한 상좌부의 중심으로, 동부지역은 보다 탄력적인 모습을 보인 대중부의 중심이 됩니다.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왕조의 세 번째 왕, 법왕 아쇼카는 근본분열 100여년 후 등장합니다.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에 귀의한 후 붓다의 사리를 봉안했던 근본팔탑을 해체해 인도 전역에 팔만사천개의 사리탑을 세웁니다. 아쇼카왕의 사리탑 건립은 붓다의 발자취와 관련해 상대적으로 동방교단에 밀렸던 서방교단의 권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적과 사리탑은 모두 인도 동부지역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율장을 고수하며 부처님 당시 교단의 원형을 내세우는 서방교단이 동방교단의 권위를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쇼카왕이 인도 전역에 사리탑을 세우면서 사리탑을 갖게 된 서방교단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올라갔습니다. 동방교단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8대 성지를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8대 성지를 순례하라는 언급이 ‘장아함 유행경’에서부터 나오는데 이것은 교단분열과 팔만사천탑 건립 후 동방교단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쇼카왕의 지원으로 덩치가 커진 교단은 더 쉽게 쪼개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아쇼카 사후, 교단은 스무 개 이상으로 나뉩니다. 이와 같은 지말분열은 불교 다양성의 확대이자 현지화였습니다. 분열은 경쟁을 통한 발전을 불러왔지만 동시에 불교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논쟁의 문화가 있는 인도에서 각 부파들은 논사들을 내세워 논쟁을 벌이고 교리와 이론을 세분화시켰습니다. 결국 신도들의 눈높이를 벗어난 교리중심의 불교는 신도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기원전후 마침내 현실에 눈을 돌리는 대승불교가 등장합니다.

대승불교의 등장배경에는 이밖에도 몇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전의 문자화였습니다. 교리가 세분화되면서 경전의 양은 방대해졌습니다. 암송에 의한 구전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또 땅이 넓고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는 인도의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경전을 외우면서도 그 의미를 이해 못하거나 다르게 해석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경전을 기록하고 주석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경전의 문자화는 출가자 뿐 아니라 재가자도 경전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결국 부처님의 생애와 교리에 대한 다양하고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며 대승경전의 출연을 불러옵니다. 동시에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의 격차가 줄어들어 승가의 위상이 낮아지는 현상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붓다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 점도 대승불교 출연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승잠복설입니다. 붓다 재세 시 신흥종교였던 불교는 출가자들보다 재가신도들에게 더 자주, 가깝게 다가갔습니다. 부처님은 스님들에게는 수행법을, 재가자들에게는 행복해지는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모여 결집을 진행하다 보니 출가자에게 하셨던 수행법 중심으로만 부처님의 말씀이 정리되어 전래됐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재가자들에게 설하셨던 부처님 가르침은 민중 속에서 구전되었고 후대에 대승경전으로 발현했다는 것이 대승잠복설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부파의 논쟁처럼 어려운 불교가 아니라는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그리움이 대승불교의 출연을 촉진시켰습니다.

이런 속에서 불탑을 중심으로 붓다를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붓다 입멸 후 사리탑 관리는 재가자들의 몫이었습니다. 탑을 관리하던 재가자들이 참배객들에게 붓다의 생애를 이야기해주며 일종의 포교사와 같은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의 신앙형태가 되면서 ‘법화경’ 형성의 배경이 됩니다.

사리탑과 함께 불상을 통해 붓다를 보려는 움직임도 등장합니다. 간다라지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습니다. 초기 간다라에서는 불상이 사리탑과 같은 권위를 갖기 위해 불상 정수리에 사리를 모시기도 했습니다. 불탑신앙이 불상신앙으로 넘어가는 모습입니다.

인도전역에서 이와 같이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대승불교는 새로운 불교에 대한 시대적 요청과 그것에 부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대승불교는 중부의 나가르주나꼰다를 중심으로 ‘화엄경’과 ‘반야경’, 동방교단을 중심으로 ‘유마경’과 ‘법화경’, 서방교단을 중심으로 ‘정토경’ 신앙을 탄생시킵니다. 이후 용수로 대표는 중관학파, 무착‧세친으로 대표되는 유식학파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트만’이라는 자아를 중시하는 인도인들의 인식에 맞춰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불성사상, 여래장 사상을 구축하며 인도불교는 절정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대승불교 등장으로 상좌부가 중심이 된 소승불교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소승불교 교단의 규모는 늘 대승불교보다 컸습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던 대승불교는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해외포교에 진력한 결과 중국으로 전해져 선불교의 시대를 엽니다.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가 마침내 중국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교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분의 신행이 더욱 깊어지길, 그리고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강연은 자현 스님의 저서 ‘불교사 100장면’ 출간을 기념하며 12월5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불교사, 이것만은 꼭 기억하자’를 주제로 열린 자현 스님의 특별강연을 요약한 것입니다.

 

[1468호 / 2018년 1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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