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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비정규직 청년의 죽음

기자명 최원형

생명보다 돈이 우선되는 사회가 만든 비극

태안발전소 청년 죽음은
인력효율화가 만든 참사
자비희사 사무량심 없이
정토세상 여는 것은 요원

때는 연말인지라 거리에는 번쩍거리는 불빛이 찬란하다. 잘 보냈든 그렇지 않든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시작될 것이다. 이 들썩이고 조금은 흥에 겨운 연말 분위기에 너무나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운전원으로 일하던 스물넷 꽃다운 청년이 사고를 당해 숨졌다. 그 청년은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1년 계약직으로 들어온 지 겨우 3개월 만에 사고가 났다. 야간에 홀로 4~5킬로미터나 되는 긴 석탄운송설비를 점검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빨려 들어가 귀한 목숨을 잃었다. 우리의 밤을 환하게 밝혀줄 전기를 생산하는 현장에서 이 청년은 깜깜한 지옥을 맞이했다. 이 청년이 살아생전, 비정규직 문제를 바로잡아 달라며 손 피켓을 들고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봤다. 마지막이 된 사진 속에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작업모를 쓴 얼굴이 아직 앳돼 보였다. 한참을 울었다. 기성세대로서 너무 미안했다. 컨베이어벨트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는 혼자였다. 사고가 나고도 몇 시간 동안 홀로 방치되었다. 이런 사고가 처음이 아니었기에 노동자들은 2인1조를 요구했으나 회사는 묵살했다고 한다.

2016년 5월 구의역에서 2인1조로 해야 할 일을 혼자 하던 열아홉 살 청년노동자가 스크린도어에 끼어 사망한 사고가 있은 지 2년 반이 지난 시점에 벌어진 사고다. 그 사이에도 청년노동자들의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청년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구조 전반의 문제다. 비용절감을 하느라 외주화하고 인력을 줄이는 와중에 사고는 쉼 없이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다. 일하는 노동자들의 안전은 이윤 계산에서 빠져버렸다. 생명보다 돈이 우위에 있는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이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2010년부터 8년 동안 모두 12명의 하청 노동자가 추락 사고나 매몰사고, 대형 크레인 전복 사고, 이번 청년 노동자가 당한 것과 같은 협착 사고 등으로 숨졌다.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에 따르면 2012~2016년 동안 346건의 사고로 발전소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숨졌다. 이 중 337건인 97%는 하청노동자들의 업무에서 발생했다. 이 기간 동안 사고로 숨진 40명 중 37명이 하청노동자였다. 조선소, 발전소, 건설현장 곳곳에서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가 죽어가고 있다. 이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사실 컨베이어벨트가 아니라 생명과 안전을 외주화한 구조다. 효율화란 이름으로 자행한 인력감축, 외주화, 구조조정이 부른 참사다. 이렇게 비용절감하고 사람을 쥐어짜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철원 평야에 겨울철새인 두루미가 왔다. 두루미들은 한낮에 가족 단위나 이웃끼리 흩어져 먹이활동을 하다가도 먹이가 많은 곳을 발견하면 고개를 쳐들고 주변 어딘가에 있을 동료들에게 알리려는지 큰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곳곳에서 두루미들이 삼삼오오 날아들고 큰 무리를 이루어 함께 먹이활동을 한단다. 이렇게 활동하던 두루미들은 노을 지는 저녁이 오면 서로서로 다가가서 체온을 나누며 다음날 새벽까지 잠을 잔다고 한다. 두루미들의 생태를 관찰한 어떤 이에게 들은 얘기다. 참 아름다운 얘기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서다. 두루미들이 찬란한 문화를 켜켜이 축적해서 이리 사는 걸까? 철학이 고고해서 이리 사는 걸까?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낼 만큼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이리 사는 걸까? 그들이 이렇게 사는 이유는 단 하나 생존에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먹이가 많은 곳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자세를 취할까? 선을 긋고 담을 치고, ‘이거 다 내 거야!’라고 할까? 쉬쉬하고 몰래몰래 내 주머니에 다 주워 담지는 않을까? 과연 몇이나 ‘여기 먹을 게 많아, 나눠먹자’라고 선뜻 얘기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외주화하고 하청으로 떠넘기며 소수의 배만 불리는 작금의 우리 사회 모습은 생존에 가장 불리한 쪽으로 가고 있다. 걷어차 버린 사다리, 그래서 그 꼭대기로 올라간 소수의 그들은 과연 무궁토록 살아남을 것인가? 이런 작태를 보고도 무관심, 외면하는 것 또한 암묵적 동조는 아닐까?

‘금강경’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모든 중생을 널리 사랑하는 마음, 모든 중생을 널리 불쌍히 여기는 마음, 모든 중생을 다 기쁘게 하려는 마음, 모든 중생을 친하고 미워함 없이 평등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곧 자비희사인 사무량심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이 정토이길 원한다면 이곳을 정토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우리가 보살이 되어 이 세상을 정토로 만들 수는 정말 없을까? 슬픔이 차오른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69호 / 2018년 1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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