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연재를 마치며
127. 연재를 마치며
  • 최원형
  • 승인 2018.12.24 16:50
  • 호수 14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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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회복은 남 먼저 생각하는 보살행서 비롯

부의 편중은 불평등 초래
테러 등 극단적 선택 높여
중생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
모두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

어느 해 여름 새벽기도에서 이산선사발원문을 처음 들었다. 불교에 막 입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새벽예불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호기심으로 처음 참석한 날이었다. 예불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스님께서 일어나시더니 뭔가를 펼치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글은 네 글자로 리드미컬했다. ‘점잖은 거동으로 모든 생명 사랑하여 이내 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하리.’ 이 대목에서 귀가 번쩍 뜨였다. ‘고통 받던 저 중생들 극락세계 왕생하며, 나는 새와 기는 짐승 원수 맺고 빚진 이들 갖은 고통 벗어나서 좋은 복락 누려 지이다. 모진 질병 돌 적에는 약풀 되어 치료하고 흉년드는 세상에는 쌀이 되어 구제하되 여러 중생 이익한 일, 한 가진들 빼오리까.’ 감탄이 나왔다. 발원문에 담긴 모든 생명들에 대한 자비심이 이토록이나 충만할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천겁만겁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 이나 이 세상 권속들도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얽히었던 애정 끊고 삼계고해 벗어나서 시방세계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사이다. 허공 끝이 있사온들 이내 소원 다하리까. 유정들도 무정들도 일체종지 이루어지이다.’ 마지막 발원문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만’의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중생들에게 이익한 일이라면 한 가지도 빼놓지 않겠다는 다짐에 더해서 발원문 끝에 이르러서는 유정들, 무정들과 더불어 일체종지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서원에 얼마나 감동했던지. 우연한 기회에 접했던 ‘금강경’이 인연되어 귀의한 불교였다.

그런데 현실에서 만나는 불교는 나에게 감동을 주던 그 불교와 많이 달랐다. 시대의 화두에 대한 고민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세계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기후변화, 핵 그리고 자원고갈과 더불어 ‘불평등’을 꼽고 있다. 부의 심각한 쏠림현상이 불러온 불평등이다. 미국이나 룩셈부르크처럼 부유한 나라의 1인당 평균소득이 부룬디나 콩고민주공화국처럼 최빈국 1인당 평균소득의 100배나 된다. 세계화로 부는 소수에 집중되었는데 이제 편중된 부가 부자나라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갈 거라고 제러드는 예측하고 있다. 부자나라들에 부메랑이 될 것들로 세 가지를 꼽았는데 질병과 테러 그리고 검소한 생활에서 풍족한 생활로의 갈망이 그것이다. 세계화로 지구 어느 곳이든 왕래가 자유로워지면서 질병의 확산도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봤다.

가난한 나라 출신들은 부자들의 삶이 어떤지 목격하게 될 것이고 분노의 표출방법이 테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실제 유럽과 미국 등에서 빈번히 벌어지고 있는 테러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있다. 불평등이 구조화되고 자리 잡을수록 극단적인 선택의 확률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테러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라 인권을 누리지 못할 때 갖는 박탈감을 물리적 폭력으로 해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이들에게 풍족한 이들의 삶은 선망의 대상이 된다. 결국 물질적 욕구를 좇게 된다. 그렇지만 제러드는 희망도 빼놓지 않고 얘기한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공동체 회복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공동체 회복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보살은 중생이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를 해결하겠다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타행을 한다.’ 티베트의 삼동린포체가 지난 12월12일부터 16일까지 4박5일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들려준 법문 내용 가운데 일부를 지면을 통해 읽었다. 읽으며 보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는 계기가 됐다. 절에서 여자신도를 부르는 호칭인 보살은 너무 흔하게 쓰여서 그 말이 지닌 가치가 많이 희석된 듯하다. 그러나 보살의 본래적 의미는 매우 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중생이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이가 보살이다. 그 고통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거나 남에게 떠넘기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책임의식’을 갖는 게 보살이다. 그래서 중생을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이타행을 하는 것이 바로 보살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회복은 보살행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 모든 존재들에 대한 자비심을 내는 일이 그 시작이지 않을까? 이산선사 발원문이 보살행을 얘기했다는 걸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3년 동안 매주 쓴 글이 130여편이 됐다. ‘모든 생명이 더불어 행복할 수는 없을까’를 숱하게 번민하던 시간이었다. 생명들의 고통을 불자들과 나누고자 노력했던 시간들이었다. 단 한 명의 불자라도 이 글이 씨앗이 되었다면 감사할 일이다. 3년 동안 지면에 글을 쓸 기회를 주셨던 모든 인연들에 또한 감사의 마음 전한다.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70호 / 2018년 1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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