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破無明混沌胚 廓然寂滅絶追求
(타파무명혼돈배 확연적멸절추구)
能開境界乾坤闢 閑放虛空日月流
(능개경계건곤벽 한방허공일월류)
亘古亘今何變易 不增不減遍圓周
(긍고긍금하변역 부증불감편원주)
森羅萬像於中現 妙用縱橫且自由
(삼라만상어중현 묘용종횡차자유)
‘무명을 깨부수어 혼돈을 잉태하고, 텅 빈 적멸 되어 추구함을 끊었다네. 능히 경계 여니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고, 한가로이 허공에 놓아둔 해와 달이 흘러오네. 예나 지금이나 어찌 변하겠는가, 더도 덜도 않고 두루 둥글어 널리 미치네. 삼라만상이 그 안에 나타나니, 종횡으로 묘한 쓰임 또한 자유롭구나.’ 원천석(元天錫, 1330~?)의 ‘대소원사(大素圓師)의 권(卷)에 쓰다(書大素圓師卷)’.
원은 둥글다. 원은 꽉 차 있고, 또한 비어있다. 원은 텅 빈 온밤의 별 하늘과 이를 바라보는 내 눈과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만월(滿月)이다. 원은 온전한 자연이며, 조화로운 우주이다.
불가의 원도 그러하다. 모든 삼라만상 품은 만당(滿堂)이며, 고요하고 고요한 산중 절집이다. 그저 허공에 지팡이를 휘두르거나, 땅에 손가락을 대고 힘껏 움직이거나, 종이에 먹물 머금은 붓을 재빨리 돌린 원이지만, 이지러지고 치우치지도 않고 균형과 비례와 조화를 갖춘 관념의 원이다. 그린 이의 충만한 마음이며, 보는 이의 허허한 마음이다.
1645년 어느 날, 일본의 선승 타쿠앙 소호(澤庵宗彭, 1573~1645)는 화공에게 하나의 원을 그리도록 명했다. 화공의 원은 선승들이 직접 그린 일반적인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순간적인 필획으로 그린 선승의 원은 필선이 굵고 두께가 일정하지 않지만, 화공이 균일한 필선으로 그린 원은 관념 속 완벽한 원형의 모습을 갖추었다.
타쿠앙 소호는 화공이 그린 원 안에 한 점(點)을 찍고, 이를 일러 자신의 수상(壽像)이라 했다. 수상은 살아있을 당시 자신의 모습을 그린 불가의 초상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그린 하나의 원인 ‘일원상(一圓相)’을 깊게 관조한 뒤에 ‘벽암록’과 ‘전등록’ 등 여러 조사전의 기록을 엮어 긴 글을 남겼다.
‘일원상’은 육조 혜능의 법맥을 이은 남양혜충(南陽慧忠, ?~775)이 자신을 찾아온 중생을 향해 손가락으로 허공에 원을 그린 일화에서 기원했다고 전한다. 이 하나의 원은 중생이 사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감싸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의 마음을 품는다. 즉 ‘일원상’은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며 얻는 깨달음의 형상을 간결하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원은 그 상징이다.
그런 이유다. 마조(馬祖)와 탐원(耽源)도 하나의 원으로 중생을 깨우쳐 이끌었다. 남전(南泉)이 원을 그리자, 귀종(歸宗)은 원 안에 앉았고, 마곡(麻谷)은 원 안에 앉은 귀종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 타쿠앙 소호는 원 안에 점을 찍었다. 그것은 자신의 초상을 완성하는 점정(點睛)이자, 자신의 본성을 담은 마음인 것이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470호 / 2018년 1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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