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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불교다] 1. 왜 기도인가

  • 새해특집
  • 입력 2019.01.02 13:23
  • 수정 2019.01.02 13:54
  • 호수 1471
  • 댓글 0

기도는 수행의 한 방법이며 건강한 삶 유도하는 기폭제

초기불교와 선종 영향으로
기도 부정하는 분위기 형성

깨달음 중심의 기도 무시는
소승적이고 부파적인 시각

일본과 동남아 불교에서는
집에 불단 두고 기도 일상화

기도는 참선과 다른 수행법
기도 통해 일행삼매 들어가

참회와 연계 내면세계 확장
보살도 완성 위해서도 필요

불교가 기도 않는 종교라면
공허한 메아리로 남겨질 것

불교의 종교적 특징이 수행이라 본다면 기도 역시 수행의 한 방법이다. 기도를 통해 일행삼매에 들어가고, 심리적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

기도의 정의가 어떠하든 종교의 생명은 기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종교에 따라 기도를 바라보는 입장이 동일하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한국 종교학을 개척한 선구적 종교학자인 장병길은 ‘종교학개론’에서 기도를 언어적 기도와 심적인 기도로 양분하고, 불교를 심적인 기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기도를 “종교의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기도라는 행위는 인간의 사고와 욕구, 필요를 언어로써 종교의 대상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유신론적인 속성의 종교에서 행하고 있는 기도의 유형에 해당될 것이다. 동시에 언어적 표현과 관계없이 인간의 마음을 종교적 대상의 경지까지 높이려는 것도 기도의 한 유형이라 본다. 아마도 불교가 지니는 무신론적 속성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적 속성을 감안한 정의라 볼 수 있다.

반면 일본인 종교학자 기시모토 히데오(岸本英夫)는 ‘종교학’이란 저서에서 기도란 용어 대신 기원(祈願)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동양인의 종교 역사를 살펴보면 기도보다는 기원이란 종교적 행위의 비중이 컸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라 생각된다. 기도와 기원은 일방적인 개념이 아니라 쌍방형, 상호융합이란 개념과 함께 불교의 오랜 신행을 돌아보게 한다. 기시모토는 기도나 기원의 형태를 회화형, 묵도형, 정형형(기독교의 주기도문이나 동양 종교의 축원문, 발원문 등), 집단형 등으로 구분한다. 어느 종교나 이러한 형태의 형식이 혼용되고 있다. 같은 불교라도 초기불교나 선종에는 기도나 기원이 없으며, 그것은 기도나 기원의 대상인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 본다. ‘가산불교대사림’에는 불교의 기도에 대해 “부처님이나 신에게 적극 빌어 초자연적인 위신력을 기계적으로 구하는 현세 이익적인 기도, 부처님 등 숭배대상에 귀의해 믿음을 가지고 참회해 죄를 소멸하고, 감사·보은·찬탄·숭앙 등을 위해 부르는 비공리적 기도”로 구분하고 있다. 선종의 영향으로 구복적인 개념의 기도를 부정하고 있는 불교인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가산불교대사림’의 정의는 불교의 현실을 감안한 규정이라 볼 수 있다.

깨달음을 중시하는 종파는 불성이나 영원한 생명의 본질과 계합하기 위한 염원 자체를 기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정의는 고상한 만큼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분하게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부파불교의 전개와 함께 불타는 이미 초인화(超人化)되며, 대승불교에 오면 구제불로 자리잡는다. 많은 대승경전에서 반야의 완성을 통해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점, 내지 구제불과의 합일이나 찬탄, 예배를 통해 무루복과 유루복을 받는다고 강조하는 점 등을 구태여 외면할 필요는 없다. 이 경우 무루복이나 유루복을 받기 위해 행하는 종교적 행위 속에 기도가 포함된다.

깨달음만을 중시하며, 그 이외의 모든 불교적 행위를 미신 내지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은 오히려 소승적이고 부파적인 시각이라 비판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러한 성향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특수한 수행자 내지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신도에 한정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한국불교의 대다수 사찰, 종파에서는 다양한 축원과 발원, 기도회가 수없이 시행되고 있다. 깨달음이나 본성과의 합일만을 염원하는 불교적 행위가 기도이며, 다른 것은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니라고 규정한다면, 이미 사찰에서 시행되고 있는 수많은 기도행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은 한국불교가 지니고 있는 사상적, 역사적 특수성, 즉 정토와 선, 그리고 화엄사상을 지칭하는 삼문융합(三門融合)의 전통 때문이라 하더라도 역시 논리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불교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불교인구가 줄어들고 있는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나 반성이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의 문화적 흐름 속에서 불교라는 특수한 종교가 대중들의 외면을 받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라는 종교가 서구 문명권에 들어간 것 역시 역사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불교라는 종교가 없었는데도 그들은 근현대 문명을 주도해 왔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관성적인 개념, 혹은 타성적인 종교적 분위기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 아닐까?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깨달음 지상주의가 무엇인가 맹점이 있는 것은 아닌지? 깨달음 지상주의가 대중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인지 냉철한 반성이 있어야만 불교계의 당면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 본다.

필자는 한국불교가 위축되고 있는 사회현상은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개인적인 기도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 본다. 기도는 사찰에서 하는 것이며, 가정이나 일상 속에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종교로서의 불교는 그 생명력이 반감될 것이다. 사찰에서 행하는 개인기도나 집단기도 이외에도 가정이나 일상생활 속에서 개인적 기도가 일반화될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기도가 규칙화 내지 일상화된다면 불교인 개개인은 물론 종단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불교, 특히 조계종은 논리적인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선사상에 의거하여 구복적인 기도는 비불교적인 요소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이 수행을 강조하는 반면, 일상생활 속에서 지닐 수 있는 개인적인 기도의 중요성이 간과된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까운 일본불교를 보면 아침저녁으로 근행이란 명목의 개인적인 기도가 있다. 동남아시아 불교계 역시 가정에 불단을 모시고 수시로 기도하는 것으로 안다. 사찰에서 조석예불이나 사시예불을 하듯이 불교신도들은 가정이나 일상 속에서 규칙적인 기도나 기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종교행위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규칙적인 기도를 통해 자신과 이웃의 안녕을 기원하고, 바람직한 삶을 염원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닌, 종교가 지닌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의 하나인 것이다.

한국불교의 기도는 다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고 분석할 수 있다.

첫째, 기도는 수행이며, 심리적 정신적 힐링이다. 관음기도나 지장기도 등 많은 기도가 현재 사찰에서 시행되고 있다. 애초의 목적이 구복에 있든 천도에 있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기도든 상관없이, 기도가 행해지는 동안 일체의 망념을 잊고 깊은 망아의 경지에 몰입할 수 있다. ‘문수설반야경’에서 중시하는 일행삼매에 들어가는 하나의 방법이 기도이며, 그러한 점에서 기도는 참선과 또 다른 형태의 수행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불교의 종교적 특징이 수행이라 본다면 기도 역시 수행의 한 방법이며, 기도를 통해 일행삼매에 들어가고, 심리적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둘째, 불교의 기도는 참회법과 연계하여 깊은 종교적 내면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참회는 자신을 돌이켜 보는 불교적 수행의 한 방법이다. 참회란 무엇인가 잘못을 반성한다는 저차원적 기능을 떠나, 자신의 행업을 반성하고 정화하는 기도이자 수행인 것이다. 천태는 다양한 참회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바로 내면의 정화와 실상에 대한 올바른 통찰에 목적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관음참법’이나 ‘방등참법’, 그리고 ‘자비도량참법’ 등이다.

셋째, 기도는 일상 속에서도 행해져야 하며, 일상의 개인적 기도는 건강한 삶을 유도하는 기폭제이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개개인이 자신이나 가정의 안녕, 나아가 이웃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안심입명을 떠나 보살도의 완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런 염원이 사회의 안녕과 행복을 유도하는 동력인이 되리라 본다.

차차석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

기도가 지니는 순기능에 대해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기도하지 않는 종교는 공허한 메아리로 남겨질 가능성이 크다. 부파불교의 철학화 내지 전문화, 혹은 대승불교의 부파화가 어떠한 역사적 결과를 초래했던가? 기도를 통해 자신을 살펴보고 반성하며,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살피는 것이 일상화될 때, 불교라는 종교가 종교적 가치를 더욱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1471호 / 2019년 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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