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특집] 1. 3‧1운동과 불교계 역할
[3·1운동 100주년 특집] 1. 3‧1운동과 불교계 역할
  • 한동민
  • 승인 2019.01.02 14:17
  • 호수 14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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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학림 학생, 독립선언서 3000장 배포…3·1운동 전국 확산 계기

만해 스님, 1919년 2월25일경
서울 대각사서 용성 스님 만나
종교계 중심 독립운동 추진 합의
지방스님들과 연락 불통으로
두 스님만 독립선언서에 서명

2월28일 밤 중앙학림 학생 모아
독립선언서 전국 배포 조직결성
봉선사·해인사·범어사 등 16곳서
3·1만세시위에 참가하며 항일
중앙학림, 일제로부터 강제 폐교
만해 스님은 3·1운동이 발발하기에 앞서 2월28일 중앙학림 학생들의 모아놓고 독립선언서를 전국적으로 배포하도록 했다. 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고 있다. 사진은 3·1운동 당시 광화문 기념비각 앞에 모인 군중들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한용운과 백용성이 있었다. 한용운과 백용성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한국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전개된 임제종(臨濟宗)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임제종 운동은 1910년 10월 원종(圓宗)의 이회광과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히로쯔(弘津說三)가 비자주적인 맹약을 체결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는 한국불교의 역사와 정체성을 저버린 것으로 전국적 으로 반대운동이 펼쳐졌다. 일본의 한국강점에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그 중심에 만해 한용운이 있었다. 이때부터 만해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저항적인 승려로, 민족의식이 투철한 지식인으로 각인되었다.

한편 백용성은 1911년 상경하여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12년 임제종 운동으로 서울 인사동에 임제종 중앙포교당(臨濟宗中央布敎堂)을 건립하며 대중적 불교운동으로 진전되었을 때 한용운과 백용성은 이를 주도하였다. 이로써 한용운과 백용성의 위대한 만남이 본격화되었다. 만해 한용운은 불교잡지인 ‘유심(惟心)’을 1918년 9월부터 발행하던 계동 유심사(惟心社)에 기거했다. 이곳 유심사를 중심으로 불교계 만세시위가 조직되었다. 먼저 봉익동 대각사(大覺寺)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백용성을 1919년 2월25일경 방문하였다.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려 한다고 하니, 백용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의기투합하였다. 백용성은 한용운보다 속세의 나이로 15살이나 연상이었고 이미 당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었다. 그러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용운과 백용성은 임제종 운동을 함께 했을 만큼 서로 믿는 각별한 사이였다.

한용운은 불교계 대표로 호남 방면의 박한영, 진진응, 도진호, 경남의 오성월 등과 회담을 교섭하였으나 교통과 기타 사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한용운과 백용성 두 사람만이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불교계의 3‧1운동과 관련하여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한용운이 추가하였다는 점은 주장이 엇갈린다. 독립선언서의 핵심은 간명한 공약삼장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독립선언서를 최남선이 기초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약삼장의 기초자에 대해서는 최남선과 한용운으로 나뉘고 있다. 문학인 조용만과 신용하 교수 등은 최남선이 전담했다고 보는 반면 불교계에서는 한용운 첨가설을 굳게 믿고 있다. 이는 김관호, 최범술의 회고와 이갑성의 증언을 비롯하여 김상현 교수, 박노자 교수와 김삼웅 선생 등이 주장하고 있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라는 대목을 근거로 내란죄로 몰아가려던 일제가 최남선은 징역 2년6월을 선고한 데 비해 한용운은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당시 3년형은 손병희, 최린, 오세창 등 3‧1운동 주역들에게 선고됐다. 동시에 공약삼장은 자유, 비폭력, 세계주의를 골자로 하는 한용운의 사상이 담긴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918년부터 중앙학림(동국대 전신)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한용운은 1919년 2월28일 늦은 밤 중앙학림 학생들을 계동 유심사로 불러 모았다.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3000장의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그대들과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알 수 없으나 조국광복을 위해 나선 우리는 아무런 장애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우리 뜻을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 특히 그대들은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법손임을 굳이 기억하여 불교청년의 역량을 잘 발휘하라”는 각별한 당부를 하였다.

이때 모인 학생들은 신상완, 김봉신, 백성욱, 김상헌, 정병헌, 김대용, 오택언, 김법린, 박민오 등이었다. 이들 중앙학림 학생들은 인사동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하였다. 이에 신상완을 총참모로 추대하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참모로 중앙에 남아서 연락책을 겸하여 진두지휘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는 이들 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 오택언은 양산 통도사,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 정병헌은 구례 화엄사를 책임지고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3000장의 독립선언서는 이튿날 3월1일 서울 각지에 배포되었고 나머지는 전국의 각 본사에 전달되어 3‧1운동이 전국화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울 시내를 담당한 학생들은 3월1일 새벽 3시 각각 회의장을 떠나 시내 포교당과 서울 근교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지방을 담당한 학생들은 3월1일에 있은 서울 시내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제각기 지방 사찰로 향하여 지역별 만세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 중앙학림은 3‧1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강제 폐교까지 당하게 되었다.

한편 3·1운동에 대한 상황을 각 도의 일본 헌병대장·경무부장 연석회의에서 1919년 6월 보고 형식으로 제출된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에는 “불교 측에서는 중앙학림 교사 한용운 및 해인사 승려 백용성 2명은 천도교의 간부와 내통하여 선언서에 서명하였으나, 30본산사무소의 최고 간부들은 하등 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불교도 가운데서 불령자(不逞者)로 지목되는 것은 중앙학림 생도 일부와 전기 서명자 2인과 친교가 있는 자 및 그들의 궤변에 말려든 소수의 승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졌던 일제가 불교계 독립운동의 관련자를 한용운‧백용성과 이들과 친교가 있는 소수의 승려들 및 중앙학림 청년승려들로 축소하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교계의 3‧1운동은 이들의 희망과 달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불교계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호응하였다. 만세시위가 전개된 곳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곳만 들어도 봉선사(경기도 광주), 해인사(경남 합천), 통도사(경남 양산), 범어사(부산 동래), 표충사(경남 단장), 동화사(대구), 도리사(경북 선산), 석왕사(함남 안변) 등 16곳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도 만세 시위는 전국적으로 주요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신상완, 백성욱, 김법린 등 중앙학림 학생들은 3․1운동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운동에 대하여 직접 관여하고 전국적으로 사찰을 통한 만세시위를 조직하였다. 또한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국내와 연결하여 동지 획득과 독립자금 모금에 노력하였다.

임시정부의 ‘한일관계사료집’에 사찰령(寺刹令)을 비롯한 일제의 불교탄압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실었다. 1911년 일제가 조선불교계를 통제하고자 만든 사찰령에 대한 가장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글이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과 역량은 1919년 11월15일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로 나타났다. 이는 3․1운동 이후 1919년 11월 중순까지 독립운동 자금모금 등 불교계의 다양한 활동의 결산이자 보다 효과적인 운동을 위한 선언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 전통에 입각하여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조직을 구성하고자 했다. 국내에 ‘임시의승군헌제’에 기초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민족과 민중의 발견이자 민주주의를 우리 역사에 전면화 시킨 민족사적 대사변이었다.

1919년 3월1일부터 국내 뿐 아니라 한민족이 살던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과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한 빛나는 투쟁이었다. 더욱이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를 비롯하여 학생,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의 모든 세대가 함께 한 민족사적 분수령이자 제국주의적 질서에 도전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뿐 아니라 대한제국 황제의 ‘제국(帝國)’이 아니라 새로운 ‘민국(民國)’의 시대를 열었다.

결국 자유·민주·평등의 가치를 내건 새로운 정치체제인 민주공화제,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인민(人民)’은 우리역사의 주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은 일제에 반대한 항일독립운동이자 주권재민의 원칙을 확인한 민족·민주혁명이었다.

한 동 민수원화성박물관장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불교계의 3‧1운동도 이러한 인식의 변화에 기초하여 사찰령 철폐운동과 의승군의 조직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후 1920년대 불교유신운동과 불교청년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고, 1930년대 항일 비밀결사 만당의 결성과 활동도 3‧1운동으로 각성된 그들이었다. 불교계를 비롯한 모든 개혁운동의 밑바탕에는 3‧1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1471호 / 2019년 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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