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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2. 세계평화 지향한 불교계 3·1운동

기자명 김순석
  • 새해특집
  • 입력 2019.01.02 14:21
  • 수정 2019.01.02 14:22
  • 호수 1471
  • 댓글 0

‘조선독립의 서’ ‘승려연합회선언서’ 핵심은 만민평등‧자유

‘조선독립의서’‘승려연합회선언서’
불교계 3·1운동 숭고한 이념담겨

‘조선독립의 서’ 1919년 7월10일
만해 스님, 서대문형무소서 작성
“자유·평화, 인류의 지고한 가치
목숨 걸고서라도 지켜야” 강조
불교계 독립 정신의 정수로 평가

‘승려연합회선언서’ 1919년 11월
중국 상해서 스님 12명 연명 발표
일본 잔혹성·불교계 저항 드러내
“조국 해방까지 혈전할 것” 밝혀
불교 적극적 현실참여 의지 표명

불교계의 3·1운동은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숭고한 이념이 담겨 있었다. 특히 만해 스님의 ‘조선독립의 서’와 스님 12명이 상해에서 발표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사진 아래)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곧 불법의 실현”임을 강조하고 있다. 위 사진은 3·1운동 당시 덕수궁 앞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2019년 기해(己亥)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일제가 문화민족이었던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박탈하고 잔혹한 식민통치를 자행하였던 만행(蠻行)에 항거하여 온 국민들이 맨 몸으로 저항하였던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은 천도교·불교·기독교 등 종교계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운동을 촉발시켰다. 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의 확산과정에서 종교 조직이 크게 활용되었기 때문에 3·1운동에서 종교계의 비중은 매우 크다.

3·1운동은 제헌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한 헌법 초안에 ‘3·1혁명’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제헌국회가 헌법을 논의 과정에서 ‘3·1혁명’은 갑자기 ‘3·1운동’으로 격하되었다고 한다. 이후 60년 이상 ‘3·1운동’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만이 마치 특허 등록된 상표처럼 쓰여 왔다. ‘3·1혁명’은 일차적으로는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였으니 틀림없는 독립운동이었다. 그렇지만 ‘3·1혁명’에는 독립운동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군주제와의 혁명적 단절이었다.

3·1운동은 준비 단계에서 천도교는 자금과 독립선언서의 작성을 담당하고, 불교계와 기독교는 전국 조직망을 통하여 선언서의 배포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식민통치의 총칼 앞에 무저항으로 저항한 3·1운동의 실상을 외국 언론들은 본국에 자세히 보도하였고, 이를 통해 세계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르면 3·1운동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202만 3098명이고, 사망자 수는 7509명이며, 부상자 수는 1만 5961명으로 집계되었지만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불교계의 3·1운동은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숭고한 이념이 들어있었다. 이 숭고한 이념이 나타나는 자료는 만해 한용운이 1919년 7월10일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와 같은 해 11월15일 상해에서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이다. 이 두 문서는 모두 3·1운동의 열기가 잦아들고 제법 시간이 지난 뒤인 1919년 7월과 11월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못 이겨 친일파들이 나오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문서들이 지니는 의미는 더욱 뜻깊다.

한용운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생활을 할 때 일본인 검사는 조선독립의 타당성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다. 이때 한용운은 이 요구에 대한 답으로 작성한 것이 바로 ‘조선독립의 서’이다. 무더운 여름날 감방 안에서 아무런 참고자료도 없이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서 집필된 이 논설은 ‘조선독립의 서’ ‘조선독립의 이유서’ ‘독립이유서’ ‘3·1독립선언 이유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 논설에는 한용운의 독립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으며 불교계 독립정신의 정수이자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조지훈은 ‘조선독립의 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1운동 당시 옥중에서 선생이 기초한 ‘조선독립의 서’라는 긴 논문은 육당의 ‘독립선언서’에 비하여 시문으로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요, 조리(條理)가 명백하고 기세가 웅건할 뿐 아니라 정치 문제에 몇 가지 예언을 하여서 적중한 명문”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논설에서 한용운은 연합군과 일본 사이의 전쟁과 일본의 패망을 예언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에 조지훈은 한용운의 예지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한용운이 생존해 있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일본 패망을 예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용운은 연합국과 일본의 전쟁을 전망하였고, 조선독립을 다음과 같이 확신하였다. “이번 조선의 독립은 국가를 창설함이 아니라 한때 치욕을 겪었던 고유의 독립국이 다시 복구되는 독립이다. 그러므로 독립의 요소 즉 토지·국민·정치와 조선 자체에 대해서는 만사가 구비되어 있어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각국의 승인에 대해서는 원래 조선과 각국의 국제적 교류는 친선을 유지하여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바다. … 다만 문제는 일본의 승인 여부뿐이다”라고 하였다.
 

한용운은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기 이전 이미 4200년이 넘는 세월을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려왔기 때문에 독립국이 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다만 일본의 승인만 남았다고 하였다. 이 부분은 ‘조선독립의 서’에 나타는 작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외부 상황 변화가 없는 한 결코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인이 일본에 독립승인을 요청하는 것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행적을 평가절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논설의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한용운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게 될 경우 동아시아 사회에서 소외될 것이고 나아가 전쟁을 도발할 것이며, 그 전쟁에서 패망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한용운의 이 탁견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남짓한 세월이 지난 뒤에 현실로 나타났다. 그는 모든 인간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유를 얻고자 하며, 자유는 인간생활의 목적임을 알았기에 조선인의 자유를 유린하는 일본을 질타하였다.

한용운의 민족주의는 세계평화주의와 연결되어지며, 그의 세계평화주의는 자유와 비폭력운동으로 ‘조선독립의 서’에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문명의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피가 없는 민족은 없는 법이다. 피가 있는 민족으로서 어찌 영구히 남의 노예가 됨을 달게 받겠으며 나아가 독립자존을 도모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조선독립의 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고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 해야 한다. 실로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자유와 평화를 지고한 가치로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와 평화는 차라리 목숨과 바꾸더라도 지켜야 할 가치라고 하였다. 그 지고한 개개인의 가치가 모이면 세계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다음으로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또 다른 문건인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를 살펴보자.

1919년 11월15일 상해에서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는 한글・한문・영문으로 작성되었다. 이 선언서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던 기관지 ‘독립신문’에 ‘불교선언서’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승려연합대회선언서’로 수록되었다. 1956년에 발행된 ‘한국독립운동사’에는 ‘승려연합대회의 선언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선언서는 맨 하단에 ‘대한승려연합회’라고 쓰고 그 아래 12명 승려의 명단이 기록되어있으므로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 선언서의 요지는 이렇다. ‘총독부가 사찰령이라는 가혹한 법령을 시행함으로써 불교계는 국가로부터 얻은 자유를 잃고 조종(祖宗)의 유풍(遺風)은 인멸되고 절멸(絶滅)의 참혹한 지경에 빠졌다. 이 선언서에는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한 통치정책의 잔혹성과 불교계가 저항한 사실들이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선언서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조국이 해방되는 순간까지 혈전을 선언하였다.’

김 순 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승려연합회선언서’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불교계의 독립선언은 민족대표로 참여한 한용운‧백용성의 차원을 넘어서 불교도 전체의 여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선언서는 일본이 전세기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군국주의에 탐닉하여 인류의 평화를 교란하였다. 그런 까닭에 2000만 국민들의 원성이 높다. 이 선언서는 일본을 적으로 규정하며 민족이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였다. 또한 일본의 잔혹한 식민통치는 불교가 지향하는 인류평등과 자비정신에 배치되므로 그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소수의 바람이 아닌 민족전체의 염원이라는 것을 밝혔다. 나아가서 과거 일본보다 우수한 문화를 가졌던 우리 민족을 야만적인 방법으로 통치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해방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만인 평등을 추구하는 불법을 실현하는 것이며, 인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전교도들은 단결하여 민족해방을 성취하는 그날까지 전진하라고 촉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종래의 불교계가 은둔적이며, 비세속적이었던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표명한 것으로 한국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3·1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며, 부상을 입었고, 갖은 악형으로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다. 이러한 극한 고통을 경험하고 나서도 불교계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공존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평화를 지향하였다. 불법은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실상이 아니라고 한다. 나아가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교계 3·1운동을 대표하는 두 문건 속에는 불법의 진리와 함께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이상이 담겨 있었다.

 

[1471호 / 2019년 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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