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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 물건’ 유감

기자명 이제열

마음을 한 물건으로 여기는 건 망상

물질·마음 모두 홀로 존재 불가
마음은 그저 인연 빌려 나타난
인식기능일 뿐, 절대화는 잘못

40년 가까이 됐는가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법문이 있다. 수선회라는 참선단체에서 어느 조실스님을 초청해 법문을 청했는데 그때 들은 말씀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대중은 들으라.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일찍이 하늘을 덮고 삼세를 관통한다. 형상도 없고 빛깔도 없어 육안으로는 보려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지려야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만약 이 한 물건이 아니라면 능히 살았다고 할 수 없으니 이것이 있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대중은 알겠는가? 누구건 이 한 물건을 가져올 수 있다면 가히 비로자나 부처의 상투를 떨어뜨릴 것이다.”

당시 나는 그 조실스님의 법문을 들었을 때 조실스님이 부처님처럼 보였다. 하늘을 덮고 삼세를 관통하는 그 한 물건,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말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그 한 물건을 얻으신 조실스님,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그 뒤로 나는 한동안 조실과 방장스님들의 상당법문만 찾아다녔다. 출가스님도 아닌 20대의 젊은 속인으로 그분들 법문을 듣기란 쉽지 않았으나 그렇더라도 지금보다는 그때가 기회가 훨씬 많았다. 이로써 내게는 일반 스님들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불교 책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괜한 지식이 망상만 보탤 뿐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한 물건 마음 찾는 일이 불교의 전부라고 고집하면서 재가자들이 운영하는 선방을 드나들었다. “이 한 물건!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배고프면 밥을 찾고, 급하면 뛰는 이 한 물건이 무엇인가? 이놈만 찾으면 만사가 해결 된다는데…” 어느 큰스님으로부터 받은 화두를 참구하며 나름대로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아뿔싸, 이런 세월이 꽤 지난 어느 날 그 한 물건에 대해 엄청난 미혹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우연히 불교 책방에서 ‘대품반야경’을 보았는데 거기에 이런 말씀이 적혀있었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여래는 과거의 물질에서도 현재의 물질에서도 미래의 물질에서도 가히 물질이라고 할 만한 실체를 얻을 수 없었다. 또 과거의 마음에서도 현재의 마음에서도 미래의 마음에서도 마음이라고 할 만한 실체를 얻을 수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일체의 물질과 마음은 모두 공하여 마침내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에서 나는 한 물건에 대한 철썩 같은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로자나불 상투를 떨어뜨릴 만큼 지고한 그 한 물건이 그림자,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니? 정신을 차려 보니 부처님 말씀은 일관되게 조실스님이 설한 법문과는 방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화엄경’의 ‘본래 한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는 내용이나 ‘심지관경’의 ‘선남자여 마음은 태풍과 같고 등불과 같고 원숭이와 같고 화가와 같아 안도 없고 밖도 없고 중간도 없어 구할 수 없고 얻을 수 없다’는 내용만 보아도 마음은 조실스님이 말하는 한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참으로 전도망상의 극치가 상당법문을 통해 쏟아져 내리다니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부처님은 물질이건 마음이건 어떤 법도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중생의 행위를 행위이게끔 하는 주재자나 주체가 있지 않다고 가르치셨다. 이는 불교교리의 기본이 되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설만 이해해도 금방 파악된다. 마음은 반드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대상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십이연기설을 보라. 행을 연하여 식이 일어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중생의 의도나 행위가 없이는 마음이 마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마음을 한 물건이라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전도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은 그냥 인연을 빌려 나타난 인식기능이다. 마음이 하늘을 덮는다느니 삼세를 꿰뚫는다느니 하면서 절대화시키는 행위는 불교가 아니다. 보배라고 여기던 한 물건이 흙덩이에 금칠한 것이라고 의심해본 적은 없는가?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471호 / 2019년 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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