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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 출입카드 일주문 ① - 동은 스님

기자명 동은 스님

“들어갈 땐 번뇌 씻고 나올 땐 맑은 향 채우니”

문없는 문앞서 많이도 서성였으니
어떤 이는 산문에 발들이지 못했고
어떤 이는 발들였다가 나갔을 터
어떤 이는 지금도 드나들며 정진중

“아집 버려라” 경책하는 문인데도
많은 사람 차 타고 지나치기 일쑤
무심코 부처님 첫 치료소 지나친 것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솜이불을 덮고 있었다. 차들도 다닐 수 없게 되자 절로 올라오는 길은 인적이 끊겼다. 저 멀리 마을 쪽에서 까만 점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일주문이 모처럼 늦잠을 자고 있다가 두런두런 말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은 기도 회향일, 부처님께 올릴 떡과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오는 신도님들이었다. 모두 먼 길을 걸어 오셨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리는 눈을 피해 일주문 아래에 잠시 앉으셨다.

“아이고, 뭔 눈이 이리도 온대? 차가 올라가질 못하니 다리가 아파 죽겠네. 하기사 내가 젊었을 땐 이 길을 애 업고 공양미 머리에 이고, 북평에서 ‘저시고개’를 넘어 절에 다녔었지. 그래도 그때 생각하면 지금 이 정도는 호사지 뭐, 안 그래” “그래, 맞아. 나도 그때 큰 놈 업고 다니면서 땀 꽤나 흘렸지. 그래도 힘들었던 그때가 좋았어. 그렇지?” “하하 맞아, 맞아. 좀 쉬었으니까 또 올라가 볼까?” 보살님들은 오랜만에 추억에 젖어 깔깔거리며, 다시 눈길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멀리 사라져가는 보살님들을 일주문이 빙긋이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에 사연 없는 대문이 어디 있을까만, 그래도 절집 일주문만큼 사연을 많이 간직한 대문도 없을 것이다. 문도 없는 이 대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출가자들이 고뇌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산중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고 돌아갔을까? 그렇게 어렵게 입산해서 출가수행까지 하다가, 이런저런 사연들로 인해 이 산문을 나선 행자들은 또 얼마나 될까? 그래도 차마 이 일주문을 나서지 못하고 왔던 발걸음 다시 돌려 산사로 되돌아간 사람들이, 산중을 지키는 버팀목이 되어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있는 것이리라.

산사의 일주문에 매달려 있는 풍경들은 그 절의 온갖 애환을 간직한 타임캡슐과 같다. 바람결에 그 절절한 사연들을 모두 풀어내며 무상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나의 가슴 아픈 추억의 한 장면도 월정사 일주문 밖 어디쯤에선가 서성이고 있을 게다. 수계를 한 그해 겨울이었다. 눈이 하얗게 내린 전나무 숲길을 걸어 일주문 아래에 섰었다. 출가할 때 뭔지도 잘 모르고 꾸벅 인사하고 지나갔던 그 일주문. 잠시 숨을 돌린 후 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이 길을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과 까닭 모를 서러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다. 눈에서 나는 물인지, 눈이 녹아내리는 물인지도 모르는···. 지리산 토굴로 떠나는 걸망 위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하염없이 내렸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몇 시간을 걸어 진부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탈진상태였다.

일주문은 두 기둥 위에 서 있다. 보통 집들은 사방으로 된 기둥 위에 서 있는데 두 기둥만으로 서서 균형을 잡고 있으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하지 않으니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라고 묵묵히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 불안하면서도 위풍당당한 문에는 사실 비밀이 숨겨져 있다.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출입체크기’가 바로 그것이다. 어찌 부처님께서 일반 회사의 출입문처럼 카드를 긁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만들겠는가? 그저 법당에 딱 앉아서도 누가 어떤 소원을 가지고 올라오는지 알 정도가 되니까 부처님인 것이다.

보통은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웬만한 번뇌 망상쯤은 깨끗이 치유가 된다. ‘입차문래(入此門來)막존지해(莫存知解), 이 문에 들어올 때는 알음알이를 버려라.’ 일주문 두 기둥에 걸려있는 부처님의 처방전이 그것이다.

나만 옳고 잘났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치료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2차로 법당까지 와서 부처님 전에 소원을 빈다. 일주문을 걸어서 통과하지 않고 옆을 지나치거나, 차를 타고 쌩 지나가면 1차 치료소는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사찰을 참배할 때 일주문 밖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 것이 좋다. 멋진 대문이 있는데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 옆으로 지나다니면 일주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일주문은 사실 불자들이 사찰을 출입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곳이다. 이 문을 들어오면서 세속에 물든 마음자리를 깨끗이 비워내고, 나갈 때는 그 비워진 곳에 맑고 청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채워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주문은 복(福)이란 통장 잔고를 자동으로 체크하는 장소인 셈이다. 카드는 통장 잔고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절에 몇십 년을 다녀도 공덕을 쌓지 않고, 복 밭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통장 잔고는 늘 바닥이다. 예금도 하지 않은 통장의 카드를 쓰면서 잔고가 없다고 투덜대면 바보다. 입으로만 ‘관세음보살’ 찾지 말고, 몸으로 지금 내 곁에 ‘살아있는 부처’들을 공양해야 한다. 남편 부처, 아내 부처, 아들 부처, 딸 부처, 엄마 부처, 아빠 부처, 도반 부처, 지나가는 행인 부처, 둘러보면 부처 아닌 것이 없다.

이젠 목적지만 설정하면 그곳까지 데려다 주는 자동차가 다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하니 언젠가 신심과 복덕을 체크해주는 기계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일주문에 ‘수행자동측정기’란 것이 설치되어 통과할 때마다 “딩동, 보살님께서는 그동안 수행을 열심히 하셨군요. 이제 남은 인생도 편안하게 염불하며 행복하게 지내세요”라는 멘트를 듣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무튼 큰일 났다. 괜히 ‘절 출입카드 일주문’ 글을 쓰고 나서 지금까지 맘 편히 들락거리던 일주문이 마음에 걸리게 생겼다.

어느 날 무심코 신도님과 함께 일주문을 지나는데 “삐리릭, 스님은 요즘 수행을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보살행도 실천 안하신지가 꽤 되었군요. 초심으로 돌아가 더욱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이라도 나오면 얼마나 곤란하겠는가. 그 소리를 듣고 “어, 우리 스님 거룩하게 보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네요.”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어떡하나? 낭패지 뭐. 다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그런데 이런 측정기가 있는 것이 좋을까, 없는 것이 좋을까? 내일은 포행 가면서 일주문한테 물어봐야겠다.

동은 삼척 천은사 주지 dosol33@hanmail.net

 

[1471호 / 2019년 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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