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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⑭

불교공인은 6부체제 약화와 왕권강화라는 정치변혁 일으켜

신라불교를 위한 순교자는
이차돈 순교 이전에도 있어

정방·멸구자 등 고구려 승려
신라서 전도하다 죽임당해

이차돈이 죽게 된 계기도
6부 대표자회의에서 결정

불교가 공인되고 난 뒤에는
국왕 지위 초월적 위치로

법흥왕 상대등 임명 후에
상대등이 귀족회의 이끌어

울주 천전리서석 기록에는
관료 소속부명 쓰면서도
국왕과 스님은 쓰지 않아

국왕, 부족대표 이미지 벗고
왕호 쓰며 절대 왕권 확립

국보147호 울주 천전리서석.

신라에서는 23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라는 희생을 치른 이후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다. 이 해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가 국가부흥을 이루면서 웅천주에 양나라의 무제(武帝)를 위해 사찰을 세우고 대통사(大通寺)로 이름한 때였다. ‘대통’이라는 사찰 이름은 양의 무제가 동태사(同泰寺)에 사신(捨身)하였다가 환궁하여 새로운 연호로 선포한 것이었다. 이로써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8년(521) 양의 승려 원표(元表)의 사신 파견, 그리고 백제와 양에서 일어난 불교 흥륭의 사건들과도 무관된 것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신라의 불교 공인 사실을 서술하는 가운데 백제의 대통사 창건 사실을 특기한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공인의 더욱 중요하고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6부의 단위 정치체로서의 독자성 약화와 국왕의 위상 강화라는 정치적 변화였다.

신라에서 불교를 위해 순교당한 사람은 이차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해동고승전’에 인용된 ‘고기(古記)’에서는 이차돈 이전의 순교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양나라 대통 원년(527) 3월 11일에 아도가 일선군에 들어오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중략) 처음 신사(信士) 모례의 집에 찾아오니, 모례가 나가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지난날에 고(구)려의 승려 정방(正方)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군신(君臣)들이 괴상히 여기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의논하여 그를 죽여 버렸고, 또 멸구자(滅垢玼)라는 이가 그의 뒤를 따라 다시 왔을 때 먼저와 같이 죽여 버렸는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구하려고 여기에 왔습니까? 빨리 문 안으로 들어와 이웃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면서 데리고 들어가 밀실에 두고는 공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국보147호 울주 천전리서석 을유명 명문.

위의 기록을 통하여 법흥왕대 이전에 이미 고구려의 승려 정방과 멸구자가 연이어 신라의 모례에게 와서 전도 활동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며, 왕과 신하들이 의논하여 죽인 것을 알 수 있다. 왕과 신하들이 의논하였다는 회의는 바로 6부대표자회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법흥왕 때 이차돈의 처형을 결정한 회의와 같은 것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방과 멸구자는 고구려 승려로서 각기 전도 활동을 하다가 순교하였음에 비하여 이차돈은 왕의 측근 관료로서 불교 공인을 주장하다가 처형당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에서 불교의 수용과 공인의 주체세력으로서 모례와 같은 지방 세력과 함께 법흥왕과 그의 측근 관료인 이차돈 같은 중앙 정치세력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차돈(異次頓)은 염촉(厭髑)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그가 순교한지 290년 뒤인 41대 헌덕왕 9년(817) 8월5일에 국통 혜륭(惠隆)·법주 효원(孝圓)·김상랑(金相郞)·대통 녹풍(鹿風)·대서성 진서(眞恕)·파진찬 김억(金嶷) 등이 염촉의 옛 무덤을 수축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이 때 세운 비석이 백률사(栢栗寺)의 석당(石幢)이다. 그리고 흥륜사의 영수(永秀) 선사가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香徒)들을 모아 매월 5일에 영혼의 묘원(妙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분향했는데, 이 때 남간사(南澗寺)의 승려 일념(一念)이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다. 이 결사문은 이차돈에 관한 기록으로는 가장 정확한 사실을 전해주는데, 그에 의하면 이차돈의 성은 박씨(朴氏), 자는 염촉이며, 법흥왕의 5촌 조카로서 순교할 당시 나이는 22세, 관직은 사인(舍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인은 12등의 관등인 대사(大舍) 이하의 실무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11등의 관등인 나마(奈麻) 이상의 고위 관등 소유자로 구성되는 6부대표자회의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차돈은 6부회의체의 정식 구성원이 아닌, 법흥왕 측근의 젊은 관료로서 6부회의에 불려가서 불교공인을 역설하다가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용행(金用行)이 찬술한 ‘아도화상비’에 의하면 ‘사인(舍人)은 이때 나이 26세이며,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할아버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다’라고 하여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이차돈의 성은 석씨(昔氏)로서 혈통이 전연 다르게 기록되었는데, 박이나 석 등의 성씨는 후대에 부쳐진 것이기 때문에 그 차이는 별의미가 없다. 그리고 아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도화상비’의 내용보다 이차돈을 주인공으로 하는 ‘결사문’의 그것이 이차돈에 관한 사실로서는 좀 더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따라서 ‘결사문’에 의거하여 이차돈의 계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22대 지증마립간 때의 왕의 호칭과 23대 법흥왕 때의 율령 반포 등의 역사적 사실을 경험하면서 6부가 단위 정치체로서의 독자성이 약화되어 왕경의 행정구획으로 차츰 변모해 가는 추세 가운데 6부체제에서 먼저 벗어나게 되는 존재가 국왕이었고, 뒤이어 그를 따르는 존재가 젊은 측근 관료들이었다. 앞서 법흥왕 11년(524)의 ‘울진봉평비’를 통해서 법흥왕이 ‘탁부모즉지매금왕(啄部牟卽智寐錦王)’이라고 칭해지면서 14인으로 구성된 6부대표자회의(실제는 4부의 대표만 참석)를 대표함과 동시에 탁부의 부장으로서의 자격을 띄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이는 법흥왕의 위상이 아직 6부를 초월하는 국왕의 지위로까지 나아가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율령의 반포를 통해 국왕의 위상이 일변하는 도정이기는 하였으나, 전시대적인 부체제의 성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불교 공인의 문제를 둘러싸고 법흥왕의 측근인 이차돈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파란을 겪으면서도 불교는 공인되었고, 법흥왕 16년 (529) 마침내 살생을 금하는 왕명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보편적이고 세계적 종교인 불교가 공인되면서 단위 정치체로서의 6부의 독자성 약화와 반비례하여 법흥왕의 국왕으로서의 위상 강화는 급속히 이루어져 가게 되었는데, 특기할만한 사건으로서는 법흥왕 18년(531)의 상대등(상대등) 설치, 법흥왕 22년(535)의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의 왕호 사용과 흥륜사(興輪寺) 공사의 재개, 법흥왕 23년(536)의 ‘건원원년建元元年)’이라는 연호의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가운데 특히 6부의 독자성 약화와 국왕의 위상 강화에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 것은 상대등의 설치이다. ‘삼국사기’ ‘법흥왕 18년’조에는 “4월 이찬 철부(哲夫)로 상대등을 삼아 국사(國事)를 총리케 하였다. 상대등이란 벼슬은 이때에 시작되었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여 법흥왕 18년(531) 처음으로 설치된 관직이었음을 밝혔다. 상대등은 국왕을 대신하여 6부대표자회의의 전통을 이은 귀족회의를 주재하여 의장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국사를 총괄하였다. 귀족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와 백제의 상좌평(上佐平)과 같은 성격의 관직이었다. 상대등이 설치된 이후 국왕은 귀족회의체에서 벗어나 초월자적 지위로 상승하였으며, 탁부라는 특정부의 소속에서도 벗어나 소속부의 이름을 더 이상 관칭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등을 의장으로 하는 회의체의 구성원은 대등(大等), 또는 대중등(大衆等)으로 불렸는데, 진골귀족 출신으로 생각되는 대등들에는 이름과 관등 앞에 여전히 소속부의 이름을 관칭하였다. 신라에서는 이러한 귀족회의를 화백(和白)이라고 하였는데, 만장일치에 의하여 의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기원전 6∼5세기 석존 당시 공화국으로서의 상가(saṃgha), 상인조합으로서의 상가(saṃgha), 불교교단으로서의 상가(saṃgha) 모두 만장일치에 의하여 의결하는 회의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구성원의 화합을 강조하는 운영원칙에 의거한 것이었다. 불교교단으로서의 상가(saṃgha)를 한자로 번역할 때에 중(衆), 또는 화합중(和合衆)이라고 하였던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평등한 관계와 민주적 운영을 통하여 구성원 사이의 완전한 화합을 추구하였던 불교의 이상은 부족의식을 극복하여 화합을 이루려는 시대적 과제에 그대로 부응하는 것이었다.

상대등이 설치된 뒤 국왕의 위상은 한껏 높아져서 법흥왕 11년(524)의 ‘울진봉평비’에서와 같은 ‘탁부모즉지매금왕(啄部牟卽智寐錦王)’ 대신에 법흥왕 22년(535)에는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울주 천전리서석(蔚州 川前里書石)’ 을유명(乙酉銘)에는 “을유년 8월 4일 성법흥대왕 때에 도인 비구승 안급이와 사미승 수내지, 거지벌촌의 중사 ⃞ 인들이 (서석곡을) 보고 쓰다. (乙酉年八月四日 聖法興大王節 道人比丘僧安及以 沙彌僧 首乃至 居智伐村衆士 ⃞ 人等見記)”라고 하여 성법흥대왕이라는 왕호, 그리고 비구승과 사미승의 구체적인 이름을 들고 있다. 한문의 표기방식은 한문과 이두가 뒤섞여 있고, 글자의 순서도 한문이 아닌 우리말의 어순으로 되어 있는 등 아주 소박한 표현이지만, 왕호를 ‘성스러운 불법을 일으킨 왕중의 왕’이라고 칭하면서 소속 부명을 관칭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구승과 사미승과 함께 서석곡에 갔던 사실을 특기하고, 또한 그들 승려들에게도 소속 부명을 관칭하지 않았다. 뒷날 진흥왕 29년(568)에 수립한 순수비에서도 당시 국왕을 ‘진흥태왕(眞興太王)’이라고 칭하면서 소속 부명을 관칭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행한 승려 2명에게도 소속 부명은 관칭하지 않은 반면에 수행한 대등 등의 관료에게는 예외 없이 소속부명+이름+관등을 명기하였다. 이로써 먼저 부체제에서 벗어나 초월자적인 지위로 나아간 것은 국왕과 함께 불교 승려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 승려들과 동행한 사실을 특기하고 있으며, ‘성법흥대왕’이나 ‘진흥태왕’ 등의 불교적인 의미를 가진 왕호를 칭하였던 것을 보아 국왕의 위상을 높이는 데 승려들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과 진흥왕의 칭호를 ‘삼국사기’에서는 시호(諡號)라고 하였지만, 사후에 올리는 시호가 아니고 생전에 사용했던 왕호였다. 중고(中古) 시기의 왕들은 법흥왕과 진흥왕뿐만 아니라 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등도 모두 생전에 사용한 왕호였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71호 / 2019년 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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