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인이라면 아침·저녁 기도일과 가져야
수행인이라면 아침·저녁 기도일과 가져야
  • 허만항 번역가
  • 승인 2019.01.07 15:37
  • 호수 14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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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공 스님의 '무량수경청화' 법문 ㉛

수행은 불법에 비춰 수정하는 것
몸·마음 청정하면 병서 자유로워
윤회의 원인은 미혹·집착·업 때문
원인을 제거하면 모든 것이 청정
정공 스님은 윤회의 원인은 미혹과 집착, 업 때문이며 그 원인을 제거하면 모든 것은 청정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강설하신다.
정공 스님은 윤회의 원인은 미혹과 집착, 업 때문이며 그 원인을 제거하면 모든 것은 청정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강설하신다.

“극락세계 보살은 항상 자신을 점검하고 수렴하여 행동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정직하게 하며, 몸과 마음이 항상 정결 청정하여 일체의 애욕과 탐욕이 없다(檢斂端直 身心潔淨 無有愛貪).”

우리가 진정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아침저녁으로 두 차례 기도일과를 가져야 합니다. 아침 기도일과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일깨우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준수하여 우리들 자신의 사상·견해·행위를 수정해야 합니다. 저녁 기도일과는 바로 반성의 시간으로 오늘 하루 부처님께서 나에게 가르치고 인도하신 것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없는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실천하지 않았다면 서둘러 실천해야 합니다. 이미 실천하였다면 더욱 더 잘 유지하여 그것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침저녁 기도일과를 빠짐없이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아침에 경전을 한번 독송하여 불보살님께 들려주고, 저녁에도 다시 한 번 독송하여 불보살님께 들려주는 식으로 여긴다면 이는 하루 기도일과를 대강대강 해 넘기는 것입니다. 불보살님께서는 당신이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보살님 형상 앞에서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저는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준수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부처님께 증명하여 주시길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말·실천이 잘못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것을 수정해가야 합니다.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아침 기도일과는 자신을 일깨우는 시간이고, 저녁 기도일과는 반성하는 시간입니다. 항상 자신을 점검하고 수렴하여 행동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정직히 할뿐입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몸은 당연히 청정합니다. 그래서 몸은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큰 걱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정말로 병에 걸리면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체 법은 심상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병이 없지만 매일 병에 걸릴까 걱정하는데, 어떻게 병이 나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병에 걸립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입니다. 잘못된 생각이므로 이를 수정해야 합니다. 어떻게 수정하면 될까요?

아미타부처님을 염하면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언제 아미타부처님께서 병에 걸리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아미타부처님을 염하면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심리가 건강해야 합니다. 바른 생각(正念)을 일으키지 않고 날마다 그릇된 생각(邪念)을 일으킵니다. 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으로 마음속이 청정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염하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마음이 청정하면 몸이 청정해집니다. 몸이 청정하지 않으면 병에 걸리고, 몸이 청정하면 어떻게 병에 걸리겠습니까. 청정심을 닦지 않고 청정한 몸을 닦지 않으면서 날마다 그곳에서 오염됩니다. 병에 걸리지 않을까, 고통을 받지 않을까, 죽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모두 더럽히는 것으로 심각한 오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애(愛)’는 번뇌입니다. 십이인연 중에서 애(愛)·취(取)·유(有) 세 가지는 윤회의 원인입니다. 하나만 마음대로 끊어도 육도윤회를 뛰어넘습니다. 애는 미혹이고, 취는 집착이며, 유는 업입니다. 만약 애탐을 끊을 수 없다면 취로부터 끊습니다. 집착을 끊으면 윤회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취도 끊을 수 없을 때 단지 유에서 끊어야 하지만 이 공부는 더 깊습니다. 제불보살께서는 세간에 응화(應化)하시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중생과 더불어 지냅니다. 그들은 애탐 집착이 있지만, 유(有)가 없기 때문에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범부는 취와 유를 끊을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애탐을 끊는 것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탐욕의 근을 뽑아 제거하면 모든 일체번뇌는 모두 사라지고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이는 범부가 할 수 있습니다. 탐욕이 없고 몸과 마음이 청정한 이 기초위에서 믿음과 발원 명호수지로 왕생발원을 구하면 왕생하지 못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뜻과 원이 안정되어 더하거나 모자람이 없느니라(志願安定 無增缺減).”

‘안(安)’은 마음이 편안한 것이고, ‘정(定)’은 하나의 방향 목표에 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해(解)를 또렷이 배우면 어떤 경전이든 모두 학습할 수 있고, 만약 행(行)으로 장래 과를 증득하려면 단지 일문에 깊이 들어가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을 닦는 것과 해를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응당 역량을 행문(行門)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이는 반드시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마음을 일문에 집중하여야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 마음이 편안할 수 있습니다.

증가함도 없고 감소함도 없음은 뜻과 원이 안정된 모습을 형용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태어나길 구하면 깊은 믿음과 간절한 발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뜻과 발원이 안정한 것입니다. 정일하게 아미타부처님을 전념하여 이로써 정토를 장엄합니다. 그래서 세간 출세간의 일체법에 대해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고 그칠 줄 압니다.

“도를 구함에 있어 화평하고 중정한 마음을 유지하고, 잘못된 사견에 기울지 않는다(求道和正 不誤傾邪).”

‘도(道)’는 평등한 마음과 정직한 마음입니다. 본경의 경제목이 “청정평등각”인데 이것이 화정(和正)의 뜻입니다. ‘화(和)’는 중도로 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습니다. ‘정(正)’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삿된 견해와 외도로 빠지지 않고, 교묘한 수단으로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고, 삿된 것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의 심행을 약속하여 감히 넘어지거나 틀어지지 않는다(隨經約令 不敢蹉跌).”

우리는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하고 경전의 가르침에 수순하여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준수하도록 정하신 법(約)과 내리신 명령(令)을 반드시 준수하고 위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먹줄을 친 듯 바른 마음 바른 행으로 모두 무상보리의 대도를 우러러 사모할 뿐이다(若於繩墨 咸爲道慕).”

먹줄은 바른 마음과 바른 행을 비유한 것입니다. 마치 먹줄을 친 듯 감히 넘어지거나 틀어지지 않고 감히 거스르지도 않으며, 가르침에 의지하여 봉행하여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가르치면 우리는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극락보살이 평소 사모하는 것은 무상보리의 대도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것만 부러워할 뿐, 무상보리의 대도를 제외하고는 부러울 것도 없어야 합니다.

허만항 번역가 mhdv@naver.com

 

[1472호 / 2019년 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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