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견성암 선덕 수연 스님이 1월9일 8시15분 견성암 동선당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납 94세, 법랍 85세. 빈소는 수덕사 견성암 서선당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1월11일 오전 9시 견성암에서 덕숭산 수덕사 산중장으로 봉행되며, 다비는 수덕사 다비장 연화대에서 엄수된다.
성오 스님을 은사로 수덕사 견성암 법기문중에서 출가한 스님은 1940년 벽초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52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1943년 상주 남장사에서 강사 수옥 스님으로부터 사집과를 수료한 스님은 1940년부터 1951년까지 22하안거를 성만하며 오롯이 수행에 정진했다. 이후 청도 운문사 사리암 원주, 부산 보명사포교당 주지 등을 역임하고 1985년 견성암 서선당 신축불사 도감소임을 맡아 이를 완공, 1988년 조계종총무원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1973년부터 4년간 서울 대덕암 선원장, 1992~1994년 견성암 선원장을 역임하며 수좌들을 제접했다. 1995~1998년 조계종수계산림 니존중아사리로 추대됐다.
특히 1942년 8월 간월암 천일기도 당시 차 시봉 소임을 맡아 원담 스님과 함께 만공 스님을 시봉했던 스님은 후일 “만공 스님이 만해 스님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했다”는 증언을 해 교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2015년 9월 경허·만공선양회가 수덕사 화하정루에서 ‘일제강점기 만공선사의 위상’을 주제로 개최한 제7회 만공대선사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증언문에 따르면 수연 스님은 원담 스님으로부터 “(당시) 조선총독부 회의와 선학원 고승대회 등을 참석한 만공 스님이 한밤 중 삼청공원 내 은밀한 장소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을 만났고 독립자금이 등 봉투를 전달하는 것을 분명히 봤다”는 발언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수연 스님은 “당시 간월암 천일기도 역시 대외적으로는 평화기원을 표방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였다”고 밝혀 만공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학계의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수연 스님은 1946년 만공 스님의 원적 때까지 전월사에서 은사인 성오 스님 등과 함께 만공 스님을 시봉했다. 1982년 간행된 ‘만공문집’에 수록돼 있는 사진 가운데 만공 스님이 시자들과 찍은 마지막 사진 속에서는 10대 후반 수연 스님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수연 스님의 상좌인 운문사승가대학 강사 영덕 스님은 “수연 스님은 출가 초입 세웠던 발원문을 평생수지하고 계셨을 만큼 올곧게 정진해온 수행자셨다”며 “특히 만공 스님을 시봉하며 당시 목격했던 불교계 큰스님들의 독립운동을 후대에 전해주셨던 어른인 만큼 근현대 불교계의 독립운동역사를 올곧게 조명하는 것이 은사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73호 / 2019년 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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