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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일기

  • 데스크칼럼
  • 입력 2019.01.15 14:28
  • 수정 2019.01.21 11:04
  • 호수 1474
  • 댓글 0

일기는 내면 성장 돕는 매개
경봉스님 67년 동안 매일 써
일기 쓰는 일이 곧 ‘향상일로’

세월이 흘러도 중요성이 퇴색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일기가 그렇다. 기록과 성찰이라는 일기의 기본 속성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개학을 앞두고 숙제로 내준 일기를 한꺼번에 써야할 때 날씨가 어땠는지 가물거려 당황스러웠던 기억 등 누구나 일기와 관련한 추억이 한둘쯤은 있을 듯싶다.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초등학교 아이들 일기장 검사는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며, 교육부에 일기 검사를 개선하라고 권고하면서 예전의 일기 검사방식은 사라졌다. 대신 담임 선생님과 부모들이 재량껏 일기 쓰기를 지도하고 있지만 그 중요성까지 축소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기가 갖는 장점들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이뤄지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일기는 개인적 사고와 감정을 살피게 함으로써 내면의 성장을 도울 뿐 아니라 창의력, 논리적 사고, 자기표현 능력을 키워준다는 게 정설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 심리치료, 언어습득에 탁월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다. ‘난중일기’ ‘계축일기’ ‘열하일기’ ‘김성칠 일기’ ‘전태일 일기’ ‘김현 일기’ 등에서 알 수 있듯 일기는 역사적·문학적 가치도 대단히 크다.

흥미로운 것은 근현대 고승들도 일기(일지)를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다. 구하, 동산, 운허, 경봉, 청담, 벽안, 월하, 광덕 스님도 일기를 꾸준히 썼던 대표적인 스님들이다. 이 중 통도사 경봉(1892~1982) 스님은 1910년(36세) 1월1일부터 1976년(85세) 4월2일까지 무려 67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일기를 썼다.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한 경봉 스님이 일생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지가 일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도 스님이 경봉 스님을 주제로 쓴 박사학위 논문에서 면밀히 분석했듯 여기에는 스님의 걸림 없는 선의 경지와 평상심의 일상생활을 시(詩)로 술회하는 내용부터 선사들과의 법거량 내용, 제자들을 지도하는 내용, 불교계의 중요한 사건, 국가의 중요한 이슈, 승가의 일상생활, 교통수단, 절집의 농사일 등 숱한 내용이 실려 있다.

또 만공, 구하, 한암, 효봉, 운봉, 만해, 학명 스님 등 당대의 고승들과 교류했던 내용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법정 스님이 경봉 스님의 일기를 두고 “그 당시 승가의 가풍이며 절 살림살이의 양상도 넘어다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록은 단순히 사적인 기록의 영역을 넘어 현대 한국불교사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봉선사 운허(1892∼1980) 스님의 일기도 흥미롭다. 스님이 일반 노트보다 작은 탁상용 달력에 쓴 일기여서 흔히 ‘탁상일기’라고 부른다. 이 일기는 1979년 8월17일 ‘서울 경희의료원 6621호 입원하다. 정보각행이 입원비로 일백만원을 가져오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운허 스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환 스님에 따르면 운허 스님은 1959년부터 1979년까지 2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탁상일기를 썼다. 여기에는 스님이 필생의 업으로 진력을 다한 역경사업의 역사적 맥락, 관련 인물과 사건, 문헌들까지도 상세히 확인할 수 있어 당시 역경 과정을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할 정도다. 또한 역경사업과 승가교육을 통해 조국과 불교의 발전을 도모했던 출가자로서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수행은 선업을 증장시키고 악업을 소멸해가는 일이다. 이는 자신의 일상과 내면의 성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큰스님들이 일기를 썼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해가 다시 시작됐다. 연초면 이런저런 계획도 세우고 여러 바람을 가져보기도 한다. 허나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탐심에 그치기 십상이다. 일기가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옛 사람이 강조한 향상일로(向上一路)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올해는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일상을 성찰할 수 있는 일기를 쓰는 것도 한해를 보람되게 보내는 지혜일 것이다.

mitra@beopbo.com

[1473호 / 2019년 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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