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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공자의 안 될 줄 알면서도 함

기자명 김정빈

“옳은 길이라면 다만 우리는 옳은 길을 갈뿐입니다”

공자, 13년동안 중국천하 떠돌아
덕치주의 받아들인 제후는 없어
약육강식 팽배했던 당시 사회서
안될줄 알면서 이상정치 목표로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중국 고대사는 하·은·주(夏·殷·周) 등 세 시대로 분별되는데, 이를 삼대(三代)라 한다. 공자(孔子, BC 551~479)는 주나라 후기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끝 무렵 인물이다. 당시의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와 열두 제후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공자는 열두 제후국 중 하나인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추읍(鄒邑)에서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安徵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자가 평생에 걸쳐 가장 존경한 인물은 주공(周公)이다. 주공은 주나라의 창건자인 무왕(武王)의 아우이자 무왕의 뒤를 이은 성왕(成王)의 숙부인데, 그는 종주국인 주나라에서는 천하의 국정을 총괄하는 총리였고, 봉토로 받은 노나라에서는 제후로서의 군주였다.

주공은 중앙 정부에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노나라를 자신의 아들인 백금(伯禽)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는 중앙 정부에서 예악(禮樂)을 비롯한 문물제도를 정비함으로써 주왕조의 문화적 기초를 마련했는데, 그가 제정한 예악은 가장 먼저 노나라에 전파되었다. 이는 노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공자가 주공과 그가 제정한 예악에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공자는 이후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공자는 열아홉 살에 혼인을 하여 곧 아들을 낳았다. 공자는 배움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으로서 그는 서른 살 무렵에 일가를 이루었고, 서른다섯 살부터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공자는 스무 살 때 창고를 관리하는 위리(委吏)라는 직위에 등용되었고, 그다음 해에 사직리(司直吏)로 승진했다. 낮은 벼슬로부터 시작된 그의 공직은 쉰다섯 살에 사구(司寇)에 오르고, 두 해 뒤에는 대사구(大司寇)에 오름으로써 정점을 찍게 된다. 사구는 오늘날의 법무장관, 대사구는 총리대행에 해당되는 직위이다.

공자에 의해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지자 이웃나라인 제(齊)나라는 아연 긴장했다. 그들은 상대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미녀 80인과 좋은 말 40필을 노나라에 보냈다. 그러자 노나라 조정이 미녀들과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빠져 정사를 폐지하다시피 하였다. 노나라 군주인 정공(定公)에게 크게 실망한 공자는 자신이 보필하여 옛 성왕들의 덕정(德政)을 재현할 만한 제후를 찾아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

이후 공자는 13년 동안 중국천하를 떠돌았다. 하지만 그의 예치(禮治)를 통한 덕치주의(德治主義)를 받아들여 주는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공자를 만난 거의 모든 제후들은 공자의 고매한 인격과 방대한 학식에 존경심을 표하기는 했지만 키가 2미터에 이르는 이 거인이 제시하는 정치사상을 수용하기에는 그릇이 작았다.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상갓집 개’처럼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 수밖에 없었다. 공자는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그를 저지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칠일 동안 포위를 당한 적이 있다. 양식이 끊겨 모두들 주린 기색이 역력했지만 공자는 제자들에게 평소처럼 예를 강론하였고, 강론이 끝나면 자신의 거처에서 홀로 거문고를 탄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를 불러들여 물었다.

“여우도 아니고 승냥이도 아닌데, 우리는 왜 이렇게 들판에서 떠돌고 있는 것이냐?”
“그것은 우리의 인덕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덕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세상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로 들어온 자공(子貢)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자공이 대답했다.

“우리의 도를 조금 낮추면 어떻겠습니까?”“너는 자신을 드높일 생각은 않고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만 하는구나.”

공자는 세 번째로 안회(顔回)를 불렀다. 같은 질문에,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스승님, 세상이 우리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개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옳은 길일진대, 우리는 다만 우리의 길을 갈 뿐입니다.”

공자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떠올랐다. 공자는 유머러스하게 말했다. “안 씨의 아들이여! 네가 만일 큰 부자였다면 내가 너의 집 집사라도 되는 것인데!”

공자는 한 은자(隱者)로부터 “안 될 줄 알면서도 굳이 하려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공자가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려는 목표는 이상으로서의 왕도 정치이다. 그러나 약육강식이 팽배해 있던 당시 사회에서 그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목표였다.

그것은 자로도, 자공도, 그리고 안회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점은 자공이 “그러니까 이상을 낮추어 현실에 맞춥시다”라고 말한 데 비해 안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낮추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 데 있다.

공자는 “좋은 정치는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면 모든 별들이 그에 따라 회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안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공자는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이상으로서의 북극성은 자리를 옮길 수도 없고, 옮겨지지도 않는다. 바른 정치를 구현하여 천하가 평화로운 사회를 이룬다는 이상을, 나는 어떤 고난을 겪는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겠다.”

중국은 역사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현자들을 배출했다. 그들 중 공자처럼 드높은 이상을 제시한 사람은 거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공자가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가망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낮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실의 가혹함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이상을 추구하면서, 넘어지면 일어서고, 끊어지면 붙이는 사람.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도 유유히 거문고를 탄주하며 내적인 즐거움을 잃지 않았던 사람. 한편으로는 인간을 상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의 명(命)을 상대한 사람. 그 인격이 내외적 중화(中和)에 이른 사람. 공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공자의 위대함의 핵심은 그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는’ 데 있다. “안 되니까 그만둔다”가 아니라, “안 될 줄 알지만 나는 한다”는 정신은 공자를 중국의 가장 저명한 사람의 차원에서 한 번 더 우뚝 솟아올라 인류의 사대스승이 되도록 해주었다.

공자는 자신의 사상을 수기(修己)·안인(安人)으로 분별했는데, 이를 불교에 대입하면 수기는 상구보리(上求菩提)가 되고, 안인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상구보리에 있어 역사상 가장 치열한 분이었고, 하화중생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정신력을 보이셨다.

수기와 상구보리, 안인과 하화중생의 길에서 우리는 때로 그것이 가능한지를 의심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어선다. 그리고 우리는 정진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의 사람다운 길이기 때문에. 그것이 삶을 삶답게 하는 단 하나의 방향이기 때문에!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73호 / 2019년 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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