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
  • 주영미 기자
  • 승인 2019.01.21 17:31
  • 호수 14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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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는 견성, 우리는 왜 안 될까요?

옛 선사들 3일에 된다는 견성
일생을 정진해도 안 되는 것은
중생소견으로 꽉 찬 삶으로
마음을 제대로 못 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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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씀을
진실하게 믿고 용맹정진하면
인생을 대자유인으로 살아가고
견성성불 길도 비로소 열릴 것
경선 스님은 “마음을 바로 알고 보면 대자유인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중생소견 때문에 그 마음을 보지 못한다”며 “실상을 바로 알기 위해 부단히 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선 스님은 “마음을 바로 알고 보면 대자유인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중생소견 때문에 그 마음을 보지 못한다”며 “실상을 바로 알기 위해 부단히 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성도일입니다. 해마다 성도재일이 되면 견성오도에 대해 말을 합니다. 견성오도는 견성성불과 같은 말입니다. 견성이 성불이고 오도입니다. 성품이라고 하면 마음입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그 마음을 바로 보면 성불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듣고 있는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왜 견성을 못하는가. 지도에 부족함이 있는가, 받아들이는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가. 

달마선법(達磨禪法)에도 ‘견성오도’라고 해서 “마음이 없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마음을 보지 못하는가.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달마의 선법인 동시에 우리가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왜 그렇게 성불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일까요. 마음 하나를 놓고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 설법을 하셨습니다. 선방에서도 가행정진 기간이 되면 3시간만 자고 21시간을 정진합니다. 전국의 사찰에서도 그렇게 정진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숙제입니다. 마음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자리에 분명히 있는 것은 조금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바로 알고 바로 보면 진정한 대자유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동쪽으로 가고자 하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고자 하면 서쪽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살아도 진정한 자유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옛 선사들은 견성하는 것이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했습니다. 때리면 아픈 줄 알고 차를 마시면 차가운 줄 아는 주인공이 바로 성품이라고 하셨습니다. 옛 선사들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겁니다. 상근기는 3일이고 중근기는 일주일이고 하근기도 21일이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생동안 정진해도 안 되는 것일까요? 마음이 멀리 있으면 가야하고 안 보이면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현재 이 자리에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중생소견이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 갖고 있는 것을 업(業)이라고 하는데 저는 중생소견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일생동안 수행해도 한 생각을 바꾸기가 천지개벽보다 어렵습니다. 그것이 중생의 업이고 중생소견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중생소견에 꽉 잡혀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범어사에서 법문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작용에 있어서 법문을 듣고 얼마나 바뀌셨습니까. 바뀐 분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바뀐 것 같습니까? 들을 때 이해한 것으로 끝냈을 뿐 바뀐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중생소견, 다시 말해 범부소견이 있습니다. 이 소견도 형상으로 보려고 하면 보지 못합니다. 형상이 없는 것을 어떻게 모양으로 보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제가 주먹을 들어 보이면 형상이 보이기 때문에 주먹인줄 압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주먹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 소견입니다. 손바닥을 보이면 손바닥으로 인식하는 그것이 중생소견입니다. 중생소견은 불변소견입니다. 도무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실체도 형상으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마음이라는 실체가 모양으로 이뤄진 것 보셨습니까?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끝없이 형상을 통해서 그 마음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병통이 여기에 있습니다. 

깨달음은 전광석화, 불이 번쩍이는 것과 같습니다. 전광석화를 소견으로 보려고 하면 볼 수 없습니다.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목전에 있지만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소견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평생 헛수고를 합니다. 그래서 최상근기는 언하돈오(言下頓悟). 말이 필요없습니다. 분별사량 하는 순간에 십만팔천리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입니다.

그 찰나만 어그러져도 십만팔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생각을 움직이는 순간 멀어진다고 했습니다. 꽃을 들어 보이면 웃었다고 하지만 웃는 것도 늦었습니다. 웃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고 버리려 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구하려고 하면 더욱 멀어집니다. 이미 쥐고 있는데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이상을 버려야 합니다. 

주인공은 무형상입니다. 잠을 잘 때도, 말을 할 때도, 어묵동정에 한 번도 여러분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들었지만, 또 형상으로 찾게 됩니다. 병이 여기에 있습니다. 평생 공화(空華)를 잡으려고 하면서 옳고 그름을 시비한다고 했던 말도 이와같은 의미입니다. 

마조선사께서는 “마음이 부처”라고 하셨습니다.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인연에 따라서 형성된 것뿐입니다. 그런데 한 제자가 찾아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을 때, “이해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부처라네”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이 말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계시는 아미타불이 부처님입니까? 부처님은 아무리 조성을 잘하고 칠을 잘해도 진짜는 아닙니다. 마조선사가 제자를 바라보며 “자네는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에 제자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도 문제가 없는데 스스로 삿된 소견을 갖고 밖으로 마음을 찾다보니 더욱 멀어집니다. 밖에 있으면 밖으로 구하면 되는데 밖에 없기 때문에 구할 수 없습니다. 말장난이 아니고 실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기까지는 부단한 용맹심을 내고 정진을 할 때 계합이 되는 것이지요. 그냥 알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임제선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대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각자 사용하고 있는 마음자리는 불조와 전혀 다르지 않거늘 왜 밖에서 찾아 헤매는가. 착각하지 말라. 밖에서 구할 법도 없고 안에서 얻을 법도 없다. 다만 평소대로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아무런 일없이 보내어도 된다.” 

심법(心法)은 이렇게 쉽고도 어렵습니다.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컵이 있습니다. ‘컵’이라고 하면 여러분이 인지하고 있는 형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생의 삿된 소견으로 형상이다, 모양이다, 그런 것을 갖고 찾으려고 하니 힘든 것입니다. 임제선사의 말씀은 사실 너무 쉽게 여겨지기 때문에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많은 노력 끝에 스스로 체득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눈앞에 당신이 누구인가?” 이것을 확실하게 알면 그만입니다.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부단히 노력했을 때 이 말이 귀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형체가 모양이 없이 분명히 밝고 뚜렷한데 홀로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각자 갖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그 고정관념이 옳은 것도 아닌데 옳은 것처럼 믿는 중생소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는 그럴듯한데 일어서는 순간 사라집니다. 법문은 사라지고 일용사(日用事)만 갖고 살아갑니다. 

좌선과 동선, 행선은 선 수행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의 방편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여기에서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이 일어나면 십만팔천리나 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쉬운 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고 하였습니다. 

마조선사가, 제자를 바라보면서 “자네는 누구인가?” 이 말에 제자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말이 마음에 와 닿기까지는 부단한 용맹심을 내어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단한 노력 끝에 견성오도를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지침도 없이 6년을 고생하셨습니다. 그 고생하신 뒤 새벽 별을 보시고 깨달으셨습니다. 그 가르침대로 다가가면 됩니다. 길을 알려 주었지만 안 되는 이유는 각자의 중생소견 때문입니다. 일어서는 순간 사라지고 여러분의 생활 속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보고 나면, 절대 견성오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24시간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밥을 먹고 시비분별하는 그 주인공이 바로 마음입니다. 견성하는 것이 성불하는 것입니다. 모양으로 보려고 하면 멀어집니다. 바깥으로 구하면 더욱 멀어집니다. 선사의 당부를 새기면서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과 함께 좌선에 들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경선 스님이 1월12일 금정총림 범어사에서 봉행된 성도재일 기념 철야정진 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1474호 / 2019년 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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