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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와 수학-참값과 오차

기자명 강병균

현실이 유리수 세계라면 깨달음은 무리수 세계

완벽한 열반의 상태는 참 값
하지만 세상은 오차의 세계
끝없이 다가갈 뿐 도달 못해

사람들은 1미터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자로 재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미터는 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1000분의 1밀리 정도 차이가 날 수 있다. 자의 눈금에는 폭이 있으므로 그 폭의 어느 지점까지가 1미터인지도 모호하다. 같은 자라도 온도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하므로, 순간순간 길이가 달라진다. 온도를 지정한다 해도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바로 그 온도는 또 어떻게 만드나? 자 공장에는 표준 자가 있고 그걸 기준으로 삼아 자를 찍어낸다. 그리고 공장의 표준 자는 나라의 자를 기준으로 만든다. 옛날에는 나라에 표준 도량 용기를 보관했다. 표준 되와 표준 자를 국가가 보관했다. 하지만 표준 용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면과 끝이 부식하여 용량과 길이가 변한다. 설사 눈금에 폭이 없고 온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완벽한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물건이 그 자의 1미터와 길이가 정확히 같은지 어떻게 알 것인가? 그 물건의 원자 길이나 전자 길이 단위까지 재야하는 것일까? 그리고 자에 눈금이 없는 길이는 어떻게 알 것인가? 이처럼 자 자체에 문제가 있다. 표준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자로는 1미터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의 길이는 존재하는 것일까? 1미터의 길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현실세계에서 엄밀한 길이를 가진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상변하기 때문이다. 물질로, 1미터는 만들 수 없지만, 1미터와 차이가 1000분의 1밀리보다 작은 길이는 만들 수 있다. 참값은 만들 수 없지만, 오차는 만들 수 있다. 철학과 종교의 제 문제는 이 오차의 세계에서 참값을 찾으려 하는 데 있을 수 있다. 모든 오류의 근본일 수 있다. 1미터를 빛이 특정 시간(1/299,792,458초) 동안 진공 중에서 가는 거리라고 정의한다고 해도, 시간과 진공을 정의하지 않으면 완벽한 정의가 아니다. 시간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진공이라 하고 싶다면 아무것의 정의는 무엇인가? (자연계에 완벽한 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뭔가 있다. 그리고 완벽한 진공은 만들 수도 없다.)

완벽한 상태로서의 열반은 참값이다. 완벽한 존재로서의 참나(眞我 true atman)도 참값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오차의 세계이다.

부처도 극한이다. 깨달음도 극한이다. 불교 수행자의 마음은 시공(時空)을 따라 그리 끝없이 수렴할 뿐이다. 완벽한 이데아는 현실세계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완벽한 삼각형으로 점점 더 가깝게 만들 뿐이지, 완벽한 삼각형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 물질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유리수의 세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끝없이 가까이 갈 수만 있지, 도달할 수는 없다. 이등변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길이는 한 변의 길이의 배이다. 원의 길이는 지름의 배이다. 하지만 아무리 삼각형과 원을 잘 만들어도 이 값들을 얻을 수는 없다. 현실의 물질세계는 오차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현실세계가 유리수의 세계라면, 깨달음의 세계는 무리수의 세계이다. 복소수는 현실 물질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리학·전자기학 등에 필수이다. 이를 이용하면 자연현상의 원리를 발견하고 멋지게 설명할 수 있다. 현실 물질세계의 오차를 줄일 수 있는 무형의 존재이다. 현대에 와서는 오차를 나노분의 일의 단위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참값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아예 참값 자체가 없을 수 있다. 참값은 허상일 수 있다. 물론 유용한 허상이다. 현실세계가 실수의 세계라면, 깨달음의 세계는 복소수의 세계이다. 

수학이라는 무형의 세계는 새로운 존재이다. 삼각형 원 무리수 복소수는 새로운 존재이다. 대뇌 신피질이 생기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달해야만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신비로운 존재의 세계이다. 이 무형의 존재들은 서로 의지해 존재하므로 연기체(緣起體)이지만, 이들의 세계는 자기들 사이에 시간적인 전후가 존재하지 않는 무(無)시간적 연기의 세계이다. 사실은 아예 시간이 없는 세계이다. 물질세계의 본질인 변화(無常 무상, 無我 무아)가 없기 때문이다. 열반이 상(常)의 세계라면, 수학은 열반처럼 무위법의 일종이다. 열반이 시간을 초월한 세계라면, 수학은 열반처럼 무위법의 일종이다. 하지만 택멸무위도 아니고 비택멸무위도 아니다. 그냥 새로운 무위법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74호 / 2019년 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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