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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법성게’ 제15구 :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기자명 해주 스님

발심이 곧 정각이니, 초발심은 마음 속 부처님 지혜의 표출

초발심이 정각이라는 말은
시작·끝 같은 계위 없는 계위

신심 구족해 발심한 보살과
정각 이룬 부처는 같은 자리

법성게의 첫 글자와 끝 글자
한 가운데에 같이 둠으로써
초발심시변정각 도리 드러내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음은
초발심과 정각 상즉의 도리

선악 일으키는 것 문득 정각
다만 본래 깨달음이기 때문

꿈에 온갖 곳 돌아다니지만
깬 뒤 사실 아는 것과 같아

십세(十世)가 상즉하여 하나이나 또한 각기 상입하는 십세가 있듯이, 십세의 삼세간법 또한 원융하나 지정각세간·중생세간·기세간 등의 삼종세간이 각기 다르기도 하다. 화엄법계는 융삼세간불(融三世間佛)로서 전체가 법성신(法性身)인데 이를 바로 알지 못하는 미혹 중생을 위하여, 의상 스님이 진성(眞性)으로 마음을 삼아 법성을 증득하도록 수행 방편문을 시설한 것이 진성수연의 연기문(緣起門)이다.
 
이 연기문의 다섯째는 연기제법을 계위[位]에 근거하여 밝힌 것이다. ‘법성게’ 제15구인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과 그 다음 구절이 이에 해당한다. “처음 발심할 때가 문득 정각이다”라고 하니, 이 계위는 시작과 끝이 하나인 계위 없는 계위이다. 하나와 일체, 원인과 결과, 시작과 마지막 등이 다르지 않은 것과 같이 초발심과 정각 역시 상즉의 도리에 해당한다. 

이 “초발심시변정각”의 경증에 해당하는 법문으로는 ‘화엄경’ 범행품의 다음 구절이 주목된다. 

처음 발심할 때 문득 정각을 이루어 일체법의 진실한 성을 알아서 지혜 몸을 구족하되 다른 이의 깨우침을 말미암지 않는다.(初發心時 便成正覺 知一切法真實之性 具足慧身 不由他悟) (‘梵行品’12)

만약 보살들이 이와 같이 관행이 상응하여 모든 법에 두 가지 알음알이를 내지 아니하면, 일체 불법이 빨리 현전하여 초발심시에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일체법이 곧 마음의 자성인줄 알아서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의 깨우침을 말미암지 않는다.(若諸菩薩 能與如是觀行相應 於諸法中 不生二解 一切佛法 疾得現前 初發心時 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知一切法即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梵行品’16)

그리고 ‘초발심공덕품’에서도 보살의 초발심공덕이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한량없는 것은 “이 초발심보살이 곧 부처인 까닭이고(此初發心菩薩 即是佛故), 초발심으로 바로 부처되기 때문(以是發心 當[即]得佛故)”이라고 한다. 발심은 발보리심이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준말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려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으로 번역되니 부처님의 위없고 바른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보리심은 깨달을 보살의 마음이기도 하고 깨달으신 부처님의 마음이기도 하니, 보리심을 내는 것이 곧 바로 보리 즉 깨달음을 얻고 쓰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이러한 초발심보살의 공덕을 수십전유로 설명하였으니, “초발심시변성정각은 일전이 곧 십전인 것과 같다(如一錢即十故)”라고 한다. 이는 수행의 체를 기준으로 설한 까닭에 상즉하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 발심하는 자리는 어디인가? 의상 스님은 ‘반시’에서 ‘법성게’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한가운데에 같이 둠으로써 초발심시변정각의 도리를 그려 보이고 있다. 신심을 구족하여 발심한 보살과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이 같은 자리인 것이다. 이같이 초발심과 정각의 자리가 하나인 것을 육상으로 밝히고 있다. 계위(지위)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육상의 방편으로써 뜻에 따라서 풀어나가면 이해할 수 있다. 육상은 위에서 설함과 같다.(約位者 以六相方便 隨義消息 卽可解也. 六相者 如上說) (‘일승법계도’)

육상이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총상·별상·동상·이상·성상·괴상이다. 전체와 부분, 같고 다름, 이룸과 무너짐 등이 원융하여 둘이 아닌 것이 육상원융이다. 이 육상은 보살수행과 제법의 연기다라니를 나타내는 도리일 뿐만 아니라, 법성의 집[法性家]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으로서 지정각의 법성세계를 보이는 것임을 의상 스님은 강조하고 있다.

설잠 스님은 참성품[眞性]이 생겨남이 없고 자성이 없으며 연기도 없어서 상대가 끊어짐을 확연히 알아서, 이와 같이 발심하고 이와 같이 행하는 까닭에 초발심시에 원만하고 원만한 불과를 이미 두루 마친 것이 초발심시변정각이라 한다.   

‘화엄경’의 수행계위는 보통 42위 또는 52위로 보고 있다. 52위라 함은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등각·묘각을 일컫는다. 42위라 함은 십신을 본격적인 보살계위에 넣지 않고 전체 보살도를 지지하는 토대로 간주한 것이다. 이외에도 신·해·행·증의 4위, 보현22위 등으로 나누어보기도 한다. 보현22위란 6도인과(六道因果)와 소승인과 내지 원교(圓教)인과 등을 합한 것으로서 이 모두가 보현보살의 경계라는 것이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상.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상.

수행계위에서 42위나 52위 중에 발심하는 자리는 십주 초의 초발심주이다. 그런데 발심이 반드시 초주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십주품’에서 불지혜가 현전함을 얻어서 삼세제불가에 머무르는데 [住三世諸佛家], 이 일이 초주에서만이 아니라 초지와 제4지[生如來家]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수행법이 계위에 따라 차례로 닦아가는 항포 차제도 있지만 하나가 곧 전체인 원융 수행도 있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육상의 도리에 의해 볼 때, 비록 원인과 결과인 신(信)·해(解)·행(行)·회향(向)·지(地)·불(佛)의 6위(六位)가 각각의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앞과 뒤가 없다고 한다. ‘현수품’에서도 신(信)이 열반무상도를 개시한다고 하니, 자심(自心)이 부처인줄 철저히 믿는 청정한 신심으로 발심하고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대기’에서는 보현22위중 어느 한 지위를 따라 선악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처음 발심함이 되니 곧 이것이 바로 정각이라고 한다.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도 초발심과 정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보현 22위가 다 머무름 없는[無住] 지위이므로 처음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때에 미래의 부처님의 과위를 거둠에 이르기 때문이며, 그 대표적인 예로 만족왕(무렴족왕, 감로화왕) 선지식의 여환(如幻)법문을 들고 있다. 무렴족왕은 선재동자가 찾아갔을 때 나쁜 짓을 한 자에게 형벌을 가하고 있었다. 손과 발을 끊기도 하고 귀와 코를 베기도 하고 불로 지지기도 하는 등, 저지른 죄에 따른 형벌로 참상이 지옥과 같았다. 선재동자는 그 상황을 보고 무렴족왕이 선지식이라는 것을 잠시 의심하였을 정도였다. 그런데 무렴족왕은 여환해탈문을 얻었기에 중생들이 악업을 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려는 환화(幻化)의 방편을 보인 것이었다. 이 선지식 외에도 탐욕의 방편을 사용하는 바수밀다녀, 어리석음의 방편을 사용하는 승열바라문도 환화 방편을 쓰는 대표적인 역행(逆行) 보살로 간주되고 있다. 

아무튼 어떤 지위를 따라서 선악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문득 정각이라는 것은 앞서 미혹했다가 뒤에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본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진수기’에서는 ‘나의 몸과 마음을 바른 깨달음이라고 이름할 뿐이니 십주(十住)의 지위에 의거함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초발심시변정각하여 지혜 몸을 구족하되 다른 이의 깨우침을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발심과 필경이 다르지 않으나 발심이 더 어렵다는 그 보리심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일으킬 수 있는가? 

‘초발심주’에서는 발심의 인연을 열 가지로 설하고 있다. 보살이 부처님의 상호가 단엄하심을 보고 발심하며, 혹 가르침을 듣고 발심하며, 혹 중생들의 심한 고통을 보고 발심하는 등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를 구하고저 발심하니 옳은 도리와 옳지 않은 도리를 아는 지혜[是處非處智] 내지 삼세의 번뇌가 널리 다한 지혜[三世漏普盡智] 등이다. 이 뿐만 아니라 경에서는 발심의 인연이 거듭 거듭 설해져 있으니, 삼보와 중생 등 일체가 발심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하겠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의 발심은 자신의 깊은 신심이 문수보살의 미묘한 지혜 방편과 만나 이루어진다. 문수사리보살이 중생을 발심시키고 교화할 때 문수사리동자로 불리기도 하니, 어린아이와 같이 어리석은 중생을 위한 동사섭의 모습인 것이다. 

보리심과 그 공덕에 대해서는 미륵보살이 아주 다양한 비유로 설법하고 있다. 보리심은 종자와 같으니 모든 불법을 내며, 보리심은 깨끗한 물과 같으니 모든 번뇌의 때를 씻는다는 등, 118상으로 한량없는 보리심의 공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선재동자를 비로자나장엄장 누각으로 인도하여 해탈문을 얻게 한다. ‘법계도주’에서는 선재동자가 법계를 여의지 아니하고 일백 성(城)을 두루 거치고 초심을 넘지 아니한 채 미륵보살의 누각에 올랐다고 읊고 있다.   

반시의 융삼세간불은 삼세간이 곧 부처님의 몸과 마음임을 뜻한다. 그런데 처음 발심할 때 비로소 정각을 이룬다는 것은, 비록 예로부터 부처님이나 발심할 때라야 비로소 부처님임을 알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꿈에 온갖 곳을 돌아다니지만 몸은 잠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꿈을 깬 뒤라야 아는 것과 같다. 발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겠다. 발심이 곧 정각이니 발심후의 행은 그대로 보리의 용(用)이고 여여행이다. 초발심은 자기 마음(自心) 속의 부처님 지혜의 표출인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74호 / 2019년 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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