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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⑯

진흥왕, 중앙집권적 군사조직 완성… ‘국사’ 편찬해 국가정체성 확립

진흥왕이 7살 어린나이에
법흥왕 뒤이어 왕위에 올라

흥륜사 완공계기 출가허락
국가불교로서의 위상 완성

법흥왕의 장례식을 계기로
왕은 6부 지배층 무덤 떠나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해
6부 나뉜 군사권 중앙결집

대외적인 정복활동을 통해
남한강 상류지역으로 진출

국보198호 단양신라적성비.
국보198호 단양신라적성비.

신라의 역사에서 6부제를 근간으로 하는 지배체제상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2대 지증왕대(500〜514)부터였다. 지증왕이 추진한 순장의 금지, 농업의 권장과 우경(牛耕)의 실시, 국호의 확정과 왕호의 독점, 상복법의 반행과 지방의 군주 파견 등 여러 시책은 부체제적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어 부왕의 정책을 계승한 23대 법흥왕대(514〜540)는 중앙의 병권을 통합 관리하는 병부의 설치를 시작으로 하여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상대등의 설치, 흥륜사의 창건 등 지배체제 전반의 변화를 가져올 혁신책을 잇달아 추진하였다. 그리고 즉위 22년(535)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권위적인 왕호, 23년(536)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국왕의 초월자적 위상은 현저하게 고양되었고, 사실상 부체제적 질서는 해체되고 중앙집권적 지배질서의 기반은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새로운 지배체제의 중심을 이루는 기본 축은 현실 권력의 총체로서의 국왕, 그리고 그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지배이념으로서의 불교라는 세계종교였다. 

불교를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삼은 이른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기반을 마련한 법흥왕은 재위 27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조카인 진흥왕이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법흥왕은 아들이 없고, 그의 아우 입종(立宗, ‘울진 봉평비’ 등 금석문에는 徙夫智로 표기됨) 갈문왕도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입종의 아들인 삼맥종(彡麥宗, 沙彌의 뜻)에게로 왕위가 계승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생모로서 법흥왕의 딸이기도 한 지소태후(只召太后)가 당대의 명신 이사부(異斯夫, 일명 苔宗)의 도움을 받아 섭정(攝政)하였다. 진흥왕(540〜576)은 재위 37년 동안 왕권 강화와 대외적인 정복 활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뒷날의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고구려의 19대 광개토왕(391〜413)과 백제의 13대 근초고왕(346〜375)의 업적에 비견되었다.

진흥왕이 즉위한 540년에 우선 주목되는 사실은 법흥왕의 장례를 치루면서 장지(葬地)를 이전과는 유다르게 선정하였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장지를 애공사(哀公寺)의 북쪽 산봉우리로 결정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공인된 사찰은 흥륜사뿐이었기 때문에 애공사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한참 지난 뒤에 왕릉 부근에 원찰로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 애공사의 위치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법흥왕릉을 구체적으로 비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 경주 지역의 무덤군과 내부 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선도산(西岳) 아래에서 위쪽 방향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열을 지어 조성된 무덤군 4기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추정을 받아들인다면, 법흥왕의 사망과 왕릉 조영을 계기로 해서 국왕의 장지 선정 기준과 장례의식에 대해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법흥왕 이전의 신라 왕릉은 일정 기간 경주 분지 중앙부의 황남동·황오동·노동동·노서동 등 넓은 범위의 이른바 대릉원지구(大陵園地區)의 구릉상에 줄 곳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조영된 대부분의 고분들이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일반적 양상과는 다르기 때문에 당시 신라 지배집단의 정체성을 상징해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읍락국가인 사로국(斯盧國)을 기반으로 출발한 신라가 4세기 중반 무렵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여 6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적석목곽분을 지배집단의 주류적 묘제로 삼고 있었는데, 국사학계 일각에서는 이 시기를 6부체제기로 설정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론적으로 6부 지배층의 무덤은 모두 공동으로 관리되던 대릉원 지구에 조성됨으로써 6부는 부별로 강한 독자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연맹왕국을 구성하는 지배세력의 공동체에 소속한다는 의식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법흥왕의 장례를 계기로 하여 신라 왕실이 6부(모량부 제외) 지배집단의 공동 묘역을 떠나서 다른 새로운 지역에 그들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무덤군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법흥왕의 초월자적 위치로의 부상과 부체제적 질서의 약화, 그리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의 강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진흥왕대 전반의 지소태후 섭정기는 무엇보다도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실시하였다. 즉위한 다음 해(541)에 이사부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하여 중외의 병마사(兵馬事), 곧 군사의 일을 관장케 하였다. 이사부는 일찍이 지증마립간 13년(512)에 하슬라주(何瑟羅州, 강릉)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정복한 바 있었는데, 나무로 만든 사자로 위협하여 항복받았던 사실은 유명한 설화이다. 이사부는 진흥왕대 전반기 최고의 실력자로서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병부는 법흥왕 3년(516) 신라의 중앙 관부 가운데 최초로 설치되었는데, 6부로 나뉜 군사권을 중앙에 결집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관인 병부령은 관등이 대아찬에서 태대각간까지의 자로 임용하였으며, 또한 재상과 사신(私臣)을 겸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진흥왕대에 주목되는 사실은 6부대표자회의체를 계승한 귀족회의를 주재하고 대표하는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의 임명 사실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래 상대등은 법흥왕 18년(531)에 설치되어 최초로 철부(哲夫)가 임명되었는데, 그 3년 뒤인 법흥왕 21년(534) 철부가 사망한 이후 진흥왕대 내내 ‘삼국사기’에서는 임명 사실을 전하지 않는다.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창령 진흥왕척경비(昌寧 眞興王拓境碑)’에서 상대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 진흥왕 때에도 상대등의 임명 사실이 전연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국왕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지배체제가 구축되어가는 추세에서 전시기의 부체제적 지배질서를 대변하는 위치에 있던 상대등은 더 이상 각광을 받을 수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바로 얼마 뒤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대대적인 영역 확장 사업에 대비한 근간을 마련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서 군사조직의 정비를 서두르고 있던 진흥왕대 초기에는 상대등보다는 병부령이 더욱 중요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흥왕 5년(544)에는 병부령을 1인 증치하고, 동시에 신라 최고의 중요 군단인 6정(停)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이 된 부대로서 왕경 수비의 임무를 맡은 대당(大幢)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어 진흥왕 13년(552)에는 상주정(上州停)을 시작으로 이어 한산정(漢山停)·우수정(牛首停)·하서정(河西停)·완산정(完山停) 등을 설치하여 6정을 완성하고, 진흥왕 10년(549)에는 6정에 각각 대관대감(大官大監)의 군관을 설치하였다. 또한 뒷날 지방에 주둔하는 군단의 중핵으로 기능하게 되는 10정(停)을 모두 설치함으로써 군사조직은 상상 이상으로 치밀하게 조직되었다.

그런데 군사조직의 정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진흥왕 5년(544)에는 법흥왕대부터 시작된 흥륜사(興輪寺)의 창건 작업이 상당한 우여 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완공되었다. 그리고 신라 최초의 사찰의 이름을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명명하여 선왕인 법흥왕의 공덕을 기렸다. 또한 흥륜사의 준공을 계기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부처를 신봉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국가불교로 공인하였다. 법흥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과업을 동시에 추진해간 결과였다. 그리고 진흥왕 6년(545)에는 병부령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던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라국가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사부는 말하기를 “국사(國史)라는 것은 군신(君臣)의 선악(善惡)을 기록하여 포(褒)·폄(貶)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니, 사기(史記)를 꾸미어 두지 않으면 후세에서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렇게 여기어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 명하여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를 편찬케 하였다고 한다. 거칠부는 학자이자 장군으로서 이사부를 도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이사부가 죽은 뒤에는 그의 역할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서둘러 국사를 편찬한 것은 새로이 변화된 시대 상황에 걸맞게 지난날을 정리하고, 나아가야할 방향을 점검, 재정립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진흥왕 2년(541)에는 백제가 사신을 통하여 강화를 청해오자 승낙하였다. 백제와는 고구려의 남침에 대항하여 일찍이 눌지마립간 17년(433) 동맹을 맺은 이래 소지마립간 15년(493) 결혼동맹을 맺은 일까지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동맹 관계는 진흥왕 때까지 100여년을 지켜온 것이었다. 실제 진흥왕 9년(548)에는 고구려가 동예(東濊)와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에 쳐들어오자, 백제의 구원 요청에 부응하여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어 강병 3천명을 이끌고 가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의 즉위 초부터 대외적인 정복 활동에 대비하여 군사조직의 정비를 서두르던 신라는 진흥왕 11년(550) 마침내 한강 유역을 대상으로 삼은 영역 확장 기도로서 단서를 열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사이에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두 나라 모두 피로해진 틈을 엿보아 이사부로 하여금 출병, 습격케 하여 2성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 성들을 증축하여 무사 1천을 머물러 지키게 함으로써 북방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바로 이 무렵에 건립된 ‘단양 신라적성비(丹陽 新羅赤城碑)’를 통해서도 신라가 남한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적성비의 문장은 순수한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의 이두문과 한문이 혼용된 소박한 것이지만, 그 내용에서 왕명을 받아 출정한 이사부(伊史夫로 표기됨)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장군들이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적성(赤城,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면 하방리 소재)을 공략한 뒤에 그들을 도와 공을 세웠던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尒次)와 그와 일정한 관계에 있던 인물들을 포상하고 이를 증명하고, 나아가 적성의 지방민들을 위무할 목적에서 세운 비석임을 알 수 있다. 북방에 대한 영역 확장 과정의 사정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자료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한강 유역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 활동은 진흥왕이 성년(成年)의 나이가 되어 친정이 시작되는 진흥왕 12년(551)부터 본격화될 수 있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75호 / 2019년 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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