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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 스님을 아시나요?

  • 데스크칼럼
  • 입력 2019.02.01 20:46
  • 수정 2019.02.11 11:36
  • 호수 1476
  • 댓글 2

후손 박신조씨 발자취 좇아
초의 율맥 이은 근대 고승
수많은 스님들 행적 잊혀져

얼마 전 호은 스님에 관해 묻는 짤막한 이메일을 받았다. 2007년 6월 내금강을 다녀와 쓴 기사를 봤는데 여기에 장안사에 머물렀던 고승들 중에 호은 스님이 거론됐다며 관련 기록들을 찾아줄 수 없느냐고 했다. 당시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고 기사를 쓰기는 했지만 근대사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어려울 것 같다고 답장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의외의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이메일을 보낸 분은 남해에 거주하는 박신조(65)씨로 호은(虎隱, 1850~1918) 스님 친동생의 증손이라고 했다. 기이한 인연으로 어릴 때부터 기독교를 신앙하게 됐다는 그는 지금 모 교회의 장로였다. 그런데 환갑을 넘긴 2015년 봄 무렵 호은 스님이 자꾸 생각났다고 했다. 어린 시절 당숙들이 들려주었던 얘기들도 떠올랐다. 구한말 가난했던 증조부가 먹고살기 버거울 때 친형인 용문사 조실 호은 스님의 배려로 절일을 도우며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남에게 의지하거나 공짜를 바라면 안 된다.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했다는 것이다.

박씨는 종교의 차이를 떠나 선조이자 평생 종교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 잊히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호은 스님과 관련된 자료를 찾기 시작했고 용문사를 비롯해 화엄사, 해인사, 용화사 등 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들을 일일이 찾아 나섰다. 작은 단서라도 발견하면 연락을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2016년 7월에는 남해문화원이 호은 스님의 흔적 찾기에 선뜻 나섰고, 그런 과정을 거치며 스님의 면모도 조금씩 드러났다. 박씨가 취합한 비문, 탁본, 서간문, 계첩, 의궤, 신문기사, 사적기 등 자료들과 이를 토대로 정리한 행장은 호은 스님이 단순한 박씨의 선조를 넘어 불교계가 꼭 기억해야 할 고승이었다.

호은 스님은 1850년 8월24일 하동군 금남면에서 태어나 16세 때 남해 용문사로 출가했다. 그곳에서 불경과 율장을 깊이 공부했으며, 참선수행에도 매진했다. 특히 범해각안 스님으로부터 해동율맥을 이으며 평생 율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1880년(31세)부터 1917년(68세)까지 38년간 범어사, 송광사, 태안사, 쌍계사, 칠불암, 해인사, 대원사, 벽송사, 유점사, 건봉사, 석왕사, 화엄사, 화방사 등을 수차례씩 다니며 수계법회를 열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던 시대에 연로해 더이상 걷기 어려울 때까지 천리를 마다않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또 1908년에는 해인사 상선원에, 1912년에는 화엄사에 각각 금강계단을 세워 수계식을 지속적으로 열었으며, ‘범망경’ ‘사분율’ ‘수계의’ ‘호계첩’ 등을 목판에 새기고 이를 인쇄해 전계사(傳戒師)와 각처 선원에 배포했다. 율이 바로 서야 불교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스님은 사찰 복원 불사에도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쇄락한 용문사를 크게 중흥한 것을 비롯해 크고 작은 사찰들의 불사를 적극 도왔다. 경허 스님이 서룡화상 행장을 지은 것이나 용성 스님이 ‘귀원정종’을 쓴 배경에도 호은 스님 등의 권유가 있었다. 일생을 청정하게 살았던 스님에게 감화를 받은 이들이 수없이 많았으며, 독립운동가 초월, 근대 불교학자 포광, 화승(畵僧) 완호 스님을 비롯해 화엄사 부도전의 ‘호은대율사비’를 쓴 언론인 장지연도 그의 제자였다. 스님은 1918년 2월13일 통도사에서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으며, 그때 상서로운 빛이 6일간 밤을 밝혔다고 한다. 근대 대석학 석전 한영 스님은 이 같은 사실을 ‘호은선백입멸후 서상(瑞祥)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매일신보에 3회(1918.3.17, 3.19, 3.21)에 걸쳐 기고했다. 종증손인 박씨는 이를 토대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장지연’ 항목에 그가 호은율사의 제자로 불심이 깊었다는 점과 비문을 직접 찬했음을 포함하도록 했다.

역사는 기억이다. 허나 불교계는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정화운동을 거치며 수많은 이들의 발자취를 유실하고 망각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불교가 전해질 수 있었을까. 때때로 망각은 직무유기다.

mitra@beopbo.com

[1476 / 2019년 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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