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문화연구원장 성본 스님
한국선문화연구원장 성본 스님
  • 주영미 기자
  • 승인 2019.02.11 14:09
  • 호수 14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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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 수행으로 본래성품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지혜 얻어”

십우도, 선 법문 그림으로 표현
단순하지만 대승불교 핵심 담겨
어려운 법문 체계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깨닫게 하려는 법문
​​​​​​​
많은 종교·사상이 존재하지만
개인적 주장이 담겨 해석 달라
불법의 세계는 모두에게 평등
제불의 가르침 따라 수행하면
일체중생이 부처의 지혜 구족
성본 스님은 “십우도는 선의 법문을 단순한 그림으로 표현했지만, 그 속에는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성본 스님은 “십우도는 선의 법문을 단순한 그림으로 표현했지만, 그 속에는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오늘은 불자님들과 십우도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십우도는 선불교의 핵심이 담긴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열 장의 그림이지만 그 속에는 불교의 사상전체가 포함돼 있습니다. 십우도 그림은 중국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일본에 전해오거나 우리나라에도 해인사에 판각된 십우도가 있습니다. 

십우도 그림에서 보면 표면의 바탕에 검은색을 칠해 놓았습니다. 검은 바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생멸심(生滅心) 속에서 발심수행(發心修行)을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기신론(起信論)’의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부처의 세계에서는 수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심의 지혜를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눕니다. 생멸문은 중생심으로 작용하는 세계입니다. 중생은 생멸하는 번뇌 망념 속에서 수행이 필요하고 발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생멸문의 구조적인 체계를 검은 바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 안의 원상은 밝은 색입니다. 이는 우리 본성인 자성이 항상 청정하기 때문에 수행의 대상이 아님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청정한 진여자성이 숲속, 번뇌 망념에 갇혀 있기 때문에 검은 바탕 속에 흰 바탕을 넣었습니다. 생멸문 속에서 발심수행을 통해 본래의 진여자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수행을 그림으로 도식화 하고 있는 것이 십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우도 10장의 그림은 일심(一心)의 작용을 열 가지 논리로 구성한 그림입니다. 십우도에는 목동과 소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목동과 소는 구도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목동은 초발심의 수행자를 뜻합니다. 소는 진여본심(眞如本心), 불성(佛性)을 의미합니다. 십우도의 그림을 보면 중간에 검은 소가 흰 소로 바뀝니다. 검은 소는 무명에 찌들어있는 소를 표현한 것이고, 흰 소는 자성 청정심입니다. 소는 숲에 있습니다. 숲은 무명의 숲입니다. 번뇌 망념, 무명의 숲에 빠진 소를 찾아서 고삐를 연결하기 위해서 ‘풀’이라는 방편을 제시합니다. 그 소에게 고삐를 끼워서 집으로 데려오려 합니다. 

소는 본래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집을 뛰쳐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번뇌 망념이 없는데 갑자기 번뇌 망념이 일어난 우리의 모습을 집을 뛰쳐나간 소에 빗대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동은 소를 훈련시킵니다. ‘금강경’에 ‘조복’ ‘항복’이라는 표현이 바로 소를 훈련시키는 과정을 말합니다. ‘금강경’에는 ‘여래선호념(如來善護念)’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여기서 여래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진여본심입니다. 안목이 없는 사람은 소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방향에서 어떻게 숨었는지, 검은 소를 어떻게 흰 소로 바꿔야 하는지 모릅니다. 

십우도의 두 번째 그림 ‘견적(見跡)’은 발자국입니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이정표를 남깁니다. 이정표는 지혜를 이루게 하는 방편 법문을 말합니다. 발자국을 찾아가다보니 소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번째 ‘목우(牧牛)’에서는 검은 소가 바로 흰 소가 바뀝니다. 검은 소가 바로 흰 소로 바뀌는 것은 전식득지(轉識得智)로 전환하는 힘을 갖추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 다음 그림 ‘기우귀가(騎牛歸家)’에는 목동이 소를 타고 있습니다. 대게 ‘내가 내 마음을 찾는다’고 할 때 찾는 마음과 내 마음이 따로 있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한 마음을 갖고 왜 마음을 찾는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진여일심의 지혜가 작용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그 힘을 만들기 위해서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이 되도록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도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분의 생명 작용을 이루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그림 ‘도가망우(到家忘牛)’를 보면 사람이 집 안에 앉아 있습니다. 집은 편안한 공간입니다. 서양에서는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외출금지를 시킵니다. 감옥에서도 말 안 듣는 죄수는 독방에 가둡니다.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죠. 서양의 문화는 끊임없이 밖에 나가서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동양의 문화는 좀 다릅니다. 어릴 적 기억을 보면,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집밖으로 쫓아냅니다. 왜 그럴까요? 동양인들은 집을 벗어나면 불안하게 느낍니다. 집이라는 평안한 공간을 잃어버리면 불안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평안합니다. 이게 바로 여러 경전에서 나오는 좌도량(坐道場)입니다. 좌는 평안한 본분사의 삶을 사는 경지입니다. 

그림에서 보면 목동이 집에 되돌아왔는데, 소를 찾기 위해 사용했던 막대기, 소고삐 등 방편도구가 내팽겨 있습니다. 여기서 방편도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실을 깨닫기 위해 필요했는데, 자신이 진실된 삶을 살고 있으니까, 이제는 방편도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옷을 빌려 입지 않아도 되는 경지가 된 것입니다. 방편도구까지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자기 본분의 삶을 사는 것이 된 것입니다. 

다음은 인우구망(人牛俱忘)입니다. 원상만 있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찾는 소도 없고, 소를 찾아 나선 목동도 없어집니다. 구도의 마음을 이루기 위한 발심수행, 그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면목의 세계, 본래무일무의 세계, 공의 경지가 된 것입니다. 공이라는 세계는 근본을 의미합니다. 본래라는 뜻이고, 근본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자신의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경지입니다. 

아홉 번째 그림을 보면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 같기도 하고, 봄에 꽃이 떨어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절인연입니다. 이게 제법실상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모든 법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법실상진여법이라고 합니다. ‘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이라고도 하고 선종에서는 자연법이라는 말을 씁니다. 

‘노자’에도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를 이루는 모든 근본은 자연을 본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여법하게 생명으로 작용하는 법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모든 만물을 법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제법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은 생명의 모든 작용이 생명으로서 보존하려는 힘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법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생활하는 환경 속에서 진실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가 다 제법실상인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생명의 진실성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교의 진여법, 연기법, 생명법 등이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 살펴야 하는 것은 ‘노자’에서 말하고 있는 법과 불교의 법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는 많은 종교와 사상,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사람에 의해 주장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설법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이 한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에 ‘여래무소설(如來無所說)’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래가 설법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석가세존이 49년 동안 설법을 했는데,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이에 대해 ‘법화경’에서 “제불은 제법실상의 불지견을 개시오입했다”고 설명합니다. 즉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이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달음의 지혜에 이르도록 소개해 준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모든 제불이 그랬던 것처럼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았던 그 법을 일체중생도 깨달아서 부처의 지혜를 구족하도록 안내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와 사상, 철학은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것은 법을 설한 사람의 개인 의견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불법의 세계는 어떤 구도자에게 똑같은 평등의 세계입니다. 

열 번째 그림을 보면 까만 바탕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화엄사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보조광명입니다. 여래제불이 자기 본분사의 생명활동을 하면 보조광명이 비칩니다. 우주법계에서 하나의 실상으로 보조광명이 있습니다. 삼세여래가 모두 똑같은 경지에서 보조여래의 지혜광명의 불을 비추고, 물이 스미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지혜광명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제불의 지혜광명이 비치니 바깥의 까만 부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십우도의 열 번째 그림은 모든 지혜광명이 보조광명으로 이뤄진 세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포대화상이 나옵니다. 포대화상은 미륵의 화현으로 불립니다. 여기서 포대화상이 무엇인가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방편지혜입니다. 시절인연에 따라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누구에게나 맞춤의 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화경’에서 제불세존이 불지견으로 중생들에게 정법을 개시오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십우도는 선의 법문을 단순한 그림으로 표현했지만, 대승불교의 모든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도적인 논리체계의 사고를 중국적인 현실생활에 작용하는 도를 삶의 체계로 바꾸고, 그래서 누구라도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법문을 설하고 있는 것이 십우도 구조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림에 맞춰서 하나하나 사유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성본 스님이 1월19일 부산불교신도회관 법계정사에서 봉행된 ‘경남중고 동문불자회 기해년 새해 가족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476 / 2019년 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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