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짧지만 야무진 삶 홍도 방울 스님
87. 짧지만 야무진 삶 홍도 방울 스님
  • 이병두
  • 승인 2019.02.11 14:52
  • 호수 14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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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불교 위해 청소년·청년 포교 매진

비구·대처분쟁에 혼란했던 시절
학생회 지도하며 도심포교 매진
아침마다 서울시내 일주 도량석
불법홍포에 진력했던 작은 거인
앞줄 왼쪽부터 현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 최인석 한양대 불교학생회장, 홍도 스님과 동국역경원장 운허 스님.
앞줄 왼쪽부터 현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 최인석 한양대 불교학생회장, 홍도 스님과 동국역경원장 운허 스님.

16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로 늘 직경 50cm가 넘는 큰 목탁을 들고 보통 염주알보다 몇 배나 큰 염주를 돌리는 스님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이 빨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던 이 스님, 언제인가부터 홍도라는 법명보다 ‘방울스님’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홍도(1935~1979) 스님은 한창 활동해야 할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연을 다했지만, 현대 한국불교 포교 역사에 그가 남긴 자취는 크고 넓고 깊어서 ‘작은 체구로 짧은 삶을 멋지게 회향하고 떠난 큰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

동진출가한 스님은 비구·대처 갈등과 분쟁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불교 현실을 탓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1960년대 초반 도심포교에 뛰어들었다. 1962년부터 조계사 학생회 지도법사를 맡아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봉은사 명성암에서 수행정진하던 대불련 구도부를 비롯해 대불련 수련회와 각 대학 불교학생회 창립법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정성을 기울였다.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에 이어 전방부대를 방문해 군장병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불사도 외면하지 않았다.

스님은 서울 남산 기슭에 보현정사를 건립하고 거리포교를 실천했다. ‘서울 시민의 안녕’을 기원하며, 매일 새벽 목탁을 치며 절에서 출발해 옛 KBS방송국, 종로3가, 계동 중앙고등학교, 청와대, 옥인동, 서대문, 서울역을 지나 용산 국방부청사까지…. 그 앞을 몇 바퀴를 돌아 다시 절에 돌아오는 ‘서울시내 일주 도량석’을 돌았다.

스님의 이 ‘시내 도량석’은 “불교가 사회를 떠나면 안 된다”는 소신에 따른 행동이었다. 스님은 봉사단을 이끌고 장충‧효창‧탑골공원 등 서울시내 공원들을 찾아 ‘청소울력’을 해 시민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과 명동 대연각호텔에 불이 나자 달려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스님의 모습은 관음보살의 화현이었다.

이 사진은 1968년 한양대 불교학생회 창립법회를 마치고 찍은 것인데, 사진에서 보아도 ‘너그러운 마음과 탄탄한 포교원력’을 함께 지닌 ‘작은 거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불교를 일으켜 세우려고 젊은 불자들을 찾아 전국을 다녔던 동국역경원장 운허 스님의 인자한 모습도 그립다.

스님의 모습은 1963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열린 대불련 제1차 수련대회를 마치고 청담 스님‧덕산 이한상 거사 등과 함께 한 다른 사진에서도 확인되는데, 당시 청담‧운허‧성철‧광덕‧숭산 스님이나 덕산 거사와 같은 출재가 어른들은 불교에 활력을 불어넣어 살려내려고 몸을 아끼지 않았다. 절에서도 끼니 걱정을 하던 그 어려운 시절에는 그랬는데, 살림살이가 나아진 오늘은 어떤지…. 짧지만 굵고 야무진 삶을 살고 간 홍도 방울스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476 / 2019년 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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