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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중용

기자명 김정빈

“중용자는 인내의 장점 갖되 마음에 딱딱함이 없다”

로마의 5현제 중 네 번째 황제로
매사 공정하고 신중한 성품 지녀
국가 통치에 부단한 주의 기울여
인내 딱딱함, 아량 유약함도 살펴

로마 일천 년을 대표하는 인물로 카이사르가 거론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정(正)보다는 기(奇)에 먼저 관심이 쏠리기 때문일 것이다. 카이사르의 삶은 극단적으로 기(奇)하기 때문에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반대인 정(正)의 영역에 5현제(五賢帝)의 삶이 있다.

5현제는 로마를 번영과 융성으로 이끌었던 다섯 황제를 묶어서 지칭하는 말인데, 그들은 각각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이다.

5현제들은 모두가 다 문무를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군인 출신이었거나, 출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황제가 된 후에 군사적인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들은 강직한 성품과 함께 깊은 지성과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있었다.

5현제의 네 번째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매사를 공정하고 신중하게 다루는 엄격함을 보인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 엄격함은 자신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그는 국민에 대해서는 매우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씨를 보인 지도자였던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라는 두 명의 위대한 황제를 모셨던 철학자 프론토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해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분을 대할 때 나는 명석한 사람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나는 마치 전쟁의 신 마르스나 저승의 신 플루토 앞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바짝 긴장하곤 하였다. 나는 그분 앞에서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그분을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그렇지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에 비해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달랐다. 나는 해를 사랑하듯, 달을 사랑하듯, 인생을 사랑하듯, 애인의 숨결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듯이 그분 또한 나에게 그런 애정을 느끼고 있다고 언제나 확신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양아들로 입양되어 제위를 물려받은 아우렐리우스는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다. 그는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자신의 저서 ‘명상록’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온화한 성품을 가질 것과 심사숙고한 뒤에 일을 결정한 다음 그것을 단호하게 실행하는 의지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 나는 아버지에게서 사람들이 뒤쫓는 명예와 허영을 구하지 말 것, 노동과 근면을 사랑할 것, 공익을 위해 건의하는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일 것, 상벌을 가함에 있어서는 공과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할 것, 준엄하게 처벌하거나 관용을 베풀 경우 상황에 따라 달리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버지는 신하들에게, 그들이 식사를 할 때나 다른 지방으로 떠날 때 갖추어야 할 황제 앞에서의 여러 가지 절차를 면제해 주셨다. 그들이 긴급한 사정으로 아버지에게 예의나 절차를 소홀히 하더라도 아버지는 그들을 한결같이 관대하게 대하셨다.

아버지는 중요한 사항을 처리함에 있어 주도면밀하고 참을성 있게 검토하고 연구하셨다. 표면에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판단하여 조사를 중단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또 아버지는 친구들을 오래 사귀고 보호하셨으며, 금세 싫증을 내거나 애정을 남발하시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만족스럽고 쾌활하게 처신하셨다.

아버지는 국가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문제에 부단한 주의를 기울여 좋은 통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셨으며, 이런 행위들로 인해 생기는 비난을 강한 인내로 견디셨다. 매사에 성실한 태도로 임했기 때문에 결코 비열한 사상, 비열한 행위를 보이시지 않았다. 신기한 취미에 빠지시는 일도 없었다.

반면에 생활에 유쾌함과 윤택함을 더해주는 행운의 기회가 오면 아버지는 과시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그것을 응접하셨다. 그것들을 갖게 되면 꾸밈없이 즐거움을 누리셨으며, 그것을 갖지 못했을 때에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자유로움을 누리셨다.

어느 누구도 그분을 궤변가라든가 교양 없고 경솔한 공론가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가리켜 원숙하고 완성된 인격의 소유자로서 아첨을 초월하여 자타의 어떤 일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분은 공사를 불문하고 무례한 행동도, 뻔뻔스러운 행동도 하시지 않았다. 남과 과격하게 맞서시는 일도 없었다. 그분의 모든 언행은 심사숙고의 결과였기 때문에 때와 장소에 완벽하게 적합했고, 그것이 그분의 언행에 질서와 일관성과 조화를 주었다.

그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하고 향락에 빠져 있지만, 사실은 절제하면서도 얼마든지 향락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 이는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한 말인데, 이 말은 그분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거나 빠져들지 않은 상태에서 양쪽 모두를 건전하게 누릴 수 있었던 분이 그분인 것이다.”

불교 교리의 핵심인 중도(中道)는 나가르주나에 의해 여덟 가지로 분별되는 등 다양하고도 깊은 내용을 가진 철학이다. 그러나 그런 세밀한 부분을 제하고 나면 중도는 곧 중용(中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거불래(不去不來) 등 팔불중도(八不中道)는 최고경지로서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직결되지만, 중용은 그런 출세간법보다 세간법으로서의 의미에 치중되며, 실제의 삶에서 우리가 보다 많이 요구받는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그렇다면 중용이란 무엇일까. 중용 또한 다양다기하게 논의할 수 있겠지만 가장 간명한 정의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상태에서 시의적절하게 사물이 갖고 있는 선악이라는 양면성 중 선한 면만을 취합하되 악한 면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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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인내는 좋으나 사람을 딱딱하게 만들고, 아량은 좋으나 사람을 유약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중용자는 인내의 좋은 점을 갖되 마음이 딱딱함이 없고, 아량을 베풀되 유약함과는 거리가 멀다. 바로 그런 중용의 인격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가진 성격 중 선의 면과 악의 면은 무엇인가, 라고. 그리도 다시 묻는다. 나는 그 선한 면만을 취합하고 있는가, 그러면서 그 나쁜 면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라고.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76 / 2019년 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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