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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법성게’ 제16구 :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기자명 해주 스님

무명의 실제 성품이 불성이고 환화의 헛된 몸이 바로 법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니
동일상이라서 항상 함께 해

열반 머물 때는 생사 떠돌고
생사 떠돌 때는 열반 머물러

부처님은 세간에 안주하며
생사열반 집착이 없어 정각

​​​​​​​생사와 열반 다르다 속임은
위없는 도를 알지 못한 까닭

의상 스님이 연기분의 진성으로 증분의 법성을 거듭 보여 수행인으로 하여금 법성을 증득하도록 방편을 시설하고 있는 가운데, 계위에 의거하여 다시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를 설하고 있다.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라는 ‘법성게’ 제16구이다.
 
‘초발심시변정각’은 발심이 곧 불과를 원만히 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에 머무는 때에 항상 생사에 떠돌고 생사에 떠도는 때에 항상 열반에 머무르므로,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법기’)

유전즉생사(流轉則生死) 비전시열반(非轉是涅槃) 생사급열반(生死及涅槃) 이개불가득(二皆不可得). 허광망설자(虛誑妄說者) 생사열반이(生死涅槃異)  미혹현성법(迷惑賢聖法) 불식무상도(不識無上道). (‘보살운집묘승전상설게품’)

“유전하면 생사이고 유전하지 않음이 열반이다. 생사와 열반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없다. 생사와 열반이 다르다고 속여 망령되이 말하는 자는 현인과 성인의 법을 미혹하여 위없는 도를 알지 못한다.”

위 게송과 아울러 아래 경문은 “생사열반상공화”의 경증에 해당하는 예로 볼 수 있다. 

불자(佛子) 차보살(此菩薩) 득여시삼매지력(得如是三昧智力) 이대방편(以大方便) 수시현생사(雖示現生死) 이항주열반(而恒住涅槃). (‘십지품’)

“불자여, 이 보살이 이와 같은 삼매의 지혜력을 얻고 대방편으로 비록 생사를 시현하되 항상 열반에 머무른다.”

불자(佛子)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유십종경계자재(有十種境界自在) 하등위십(何等為十) 소위(所謂) <중략> 재열반경계이불이생사경계(在涅槃境界而不離生死境界). (‘이세간품’)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경계에 자재함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열반경계에 있으면서 생사경계를 여의지 않는다.” 

선남자(善男子) 보살약능근수십법(菩薩若能勤修十法) 즉능증득여시해탈(則能證得如是解脫) 하등위십(何等為十) <중략> 삼자(三者) 응이지혜(應以智慧) 평등관찰생사열반동일상고(平等觀察生死涅槃同一相故). (‘보현행원품’)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능히 열 가지 법을 부지런히 닦으면 능히 이와 같은 해탈을 증득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 셋째는 응당 지혜로써 생사와 열반이 동일한 모양임을 평등하게 관찰하는 까닭이다.”  

수능요달생사열반무이무별(雖能了達生死涅槃無二無別) 이상선교요익중생(而常善巧饒益眾生). (‘보현행원품’)

“비록 능히 생사와 열반이 둘이 없고 다름이 없음을 요달하나, 항상 선교로 중생을 요익케 한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역부여시(亦復如是) 부주생사(不住生死) 부주열반(不住涅槃) 역부부주생사중류(亦復不住生死中流) 이능운도차안중생(而能運度此岸眾生) 치어피안안은무외(置於彼岸安隱無畏) 무뇌처(無憂惱處). (‘십행품’)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생사에도 머무르지 않고 열반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또한 다시 생사의 흐름에 머무르지 아니하면서 능히 이 언덕의 중생을 실어 건네서 저 언덕의 안온하고 두려움 없으며 근심과 고뇌가 없는 곳에 안치한다.”  

생사란 중생들이 미혹 번뇌의 업력으로 여기서 죽어 저기서 태어나면서 육도에 떠돌며 뭇 고통을 받는 것이다. 반면 열반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다 꺼져 적정한 상락(常樂)의 경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는 뛰어 넘고 멀리 여의며, 생사 고통은 끊어지길 바란다. 수행의 목적도 일체 중생이 생사 고통을 여의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것[離生死苦 得涅槃樂]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생사 고통에서 중생을 건져주시려고 출현하신 것이다. 
 

무렴족왕선지식(왼쪽 위) 화엄경 제66권변상도. 봉녕사 소장.

그런데 경에서는 또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고 다름이 없으니 동일상이라서 항상 함께임을 설하고 있다. 의상 스님도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임을 깨달아 걸림 없고 자재하게 한다. “일체 걸림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보살명란품’) 라는, 그 일승의 경계라 할 것이다.     

‘대기’에서는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를 합해 생사라 하고, 대승의 네 열반과 ‘화엄경’의 열 열반을 합해 열반이라 한다. 분단생사는 중생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윤회하면서 겪는 생사이고, 변역생사란 성자들이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몸을 여읜 이후 중생 교화행으로 성불에 이르기 전까지 겪는 생사이다. 그리고 네 열반은 본래 청정한 열반·머무름 없는 열반·남음이 있는 열반·남음이 없는 열반 등이고, 열 열반은 ‘이세간품’에서 부처님께서 열 가지 뜻으로 나타내시는 대반열반이다. 이 생사와 열반은 서로 알지 못하며 하나로서 무분별이므로 항상 함께라는 것이다. 

생사와 열반 또한 수즉수(須卽須)와 무측(無側)의 오척신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라는 것은, 만약 계위에 의거하여 말하면 적멸한 열반의 체가 연을 좇아 생사를 이루니, 생사를 이루는 때가 곧 성품이 청정한 열반의 체이기 때문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곧 생사와 열반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연에 있다. 무엇인가? 생사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열반을 갖추고, 열반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생사를 갖추기 때문이다. 

“문. 무엇이 생사이고 무엇이 열반인가?”
“답. 생사가 곧 그대의 몸이고, 열반이 곧 그대의 몸이다.” (‘진기’)

생사와 열반이 필요로 하고 구하는 대로 연을 따라 이루어지고, 하나를 들면 전체가 일어나는 무측이라서, 생사를 들면 열반을 갖추고 열반을 들면 생사를 갖추어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 다시 말해서 생사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이니, 생사에 떠도는 몸이 곧 열반의 오척신임을 알 수 있다. 

제법은 필요로 하는 연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수즉수와 하나를 들면 전체가 따라 일어나서 그 옆에 아무것도 없다는 무측 법문은, 의상 스님과 의상계 화엄교학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모든 존재는 오척법성에 계합하여, 일체 법이 바로 나의 몸과 마음임도 누누이 강조된 바이다. 이러한 생사와 열반의 경계를 설잠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약론생사(若論生死) 즉시보현경계(即是普賢境界) 약론열반(若論涅槃) 즉시구박윤회(即是具縛輪廻) 차도(且道) 열반여윤회(涅槃與輪廻) 상거기하(相去幾何) 무명실성즉불성(無明實性即佛性)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即法身). (‘법계도주’)

“만약 생사를 논한다면 바로 이것이 보현의 경계이고, 만약 열반을 논한다면 바로 이것이 속박된 윤회이다. 자, 말해보라. 열반과 윤회가 서로 떨어진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무명의 실제 성품이 곧 불성이고, 환화의 헛된 몸이 곧 법신이다.”

생사가 바로 보현보살의 경계이고 열반이 바로 속박된 윤회로서, 열반과 윤회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 경계를 설잠 스님은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스님의 ‘증도가’를 인용하여 ‘무명실성이 곧 불성이고 환화공신이 곧 법신’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법성게과주’에서는 “생사열반상공화”를 염정무애의 연기문에 배대하고 있다. 진(眞)과 망(妄)이 하나이며 범부와 성인이 둘이 없어서, 천 파도가 다투어 일어남이 보현행의 바다이고, 이것이 연기의 대용으로서 전수문(全收門)의 극치라 한다.

이러한 “생사열반상공화” 도리를 확연히 깨닫지 못한다면 여전히 의문이 남을 수 있다. 생사는 허망하고 물든 범부세계이고 열반은 청정하고 진실한 성인의 해탈세계인데, 염오와 청정이 따로 없고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니라면, 삼악도의 원인인 십악(十惡) 등의 업도 닦아야 할 대상이 되는가?  

‘대기’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제시하고 “초발심시변정각”의 경우처럼 또 만족왕 선지식의 일을 예로 들어 풀어주고 있다. 만족왕 즉 무렴족왕이 참혹한 일을 벌인 것이 선지식의 실제 법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렴족왕 선지식의 법문을 환과 같은[如幻] 법문이라고 한 것은, 다만 삼승의 모습을 따라서 그와 같이 말한 것일 뿐이다. 

또 죄와 복이라 말한 것도 나와 남을 실제로 집착하는 지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 만약 이 집착을 여읜다면 일체의 죄와 복이 환과 같고 공과 같다는 것이다. 환화가 실제이고 또 실제가 환화임을 알 수 있다.

의상 스님은 생사와 열반에 집착하지 않음을 무착불(無著佛)이라 하고, 무착불을 안주세간성정각불(安住世間成正覺佛)이라고 부른다. 세간에 안주하면서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이다. 이 경계는 세간의 생사에 있으면서 열반에 머무르고 열반에 머물면서 생사를 따르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세간에 안주하므로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정각을 이루므로 생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부주생사(不住生死) 부주열반(不住涅槃)이니 생사와 열반을 둘 다 얻을 수 없다. 이 점은 무주(無住)가 바로 무착이고 무착의 무주 도리로, 태어나고 죽는 그것이 그대로 여여한 열반임을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하겠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76 / 2019년 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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