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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범중엄의 근심

기자명 김정빈

“공직자는 천하 근심이 먼저고 즐거움은 나중이다”

자신에게 엄격, 남에게 너그러운
유가의 덕치 현실정치에서 구현
그토록 베풀기를 좋아했던 그가
죽었을때 집안에 재물 전혀없어
공정하고 청렴한 관리모델 남겨
항상 중생 살폈으니 보살의 현신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공자에 의해 완성된 유가사상이 한(漢)왕조에 의해 통치법으로 받아들여진 이후로 동북아시아 역사는 공자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유가사상은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고, 많은 병폐를 낳기도 했다. 그 업적과 병폐의 기반에는 내면적인 덕을 바탕으로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는 덕치주의(德治主義)가 있다.

덕치주의는 얼핏 보면 좋기만 한 사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실현되기 어렵다. 그 때문에 덕치주의는 자칫 덕을 명분으로만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부덕한 정치를 하는 허위허례로 전락되어버리곤 했다. 정치의 본질이 ‘이익의 조정’임에도 불구하고 덕치주의는 ‘이익을 양보’하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문제이다. 물론 통치자가 이익을 양보하는 마음으로 피치자(被治者)인 백성들의 이익을 증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하겠지만, 그런 통치자는 어쩌다 한 사람이 날 뿐이다.

따라서 현대에 이르러 덕을 기르거나 나의 것을 남에게 양보하는 문제는 정치와는 관련짓지 않는 민주주의 정치가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또 문제이다. 정치와 덕을 완전히 떼어놓다 보니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가나 공직자들이 부덕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유가의 덕치사상을 떠올리게 된다.

남송(南宋) 시대의 정치가 범중엄(范仲淹·989~1062)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운 유가의 덕치사상을 현실정치에 구현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하위 관직을 거쳐 그는 인종(仁宗)에 의해 간관(諫官)에 등용되었는데, 그의 학문이 높은 것을 안 재상 안수(晏殊)는 각 주(州)와 현(縣)에 학교를 세우면서 범중엄을 그 책임자로 추천했다.

범중엄은, 학문은 알음알이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돈상풍절(敦尙風節), 즉 태도와 절조를 기르는 것에 기반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살아오며 철저하게 지킨 신조이기도 했다.

범중엄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다. 어느 때 자신에게서 공부를 하던 부필이라는 학생이 공부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려 하자 범중엄은 몸소 그를 뒤따라가 데리고 돌아와 공부를 하게 하였다. 후에 그는 정부에서 시행하는 특별시험에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재상 안수가 범중엄에게 당신의 제자 중 가장 우수한 제자가 누구냐고 묻자 범중엄은 부필이라고 말해주었다. 이에 안수는 부필에게 자신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훗날 부필은 송대의 가장 뛰어난 명신이자 명재상이 되었다.

범중엄이 학생을 가르치고 있던 때, 하루는 국가에서 시행한 초급 시험 합격자(秀才)로서 손(孫)씨 성을 가진 젊은이가 찾아와 공부할 돈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에 범중엄이 그에게 천 문(文)을 내어주었는데 그 선비는 다음 해도 범중엄을 찾아왔고, 범중엄은 다시 천 문을 내어주었다. 범중엄은 그에 더하여 그를 자신의 학교 학생으로 받아들여 매달 삼천 문을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해주면서 ‘춘추(春秋)’를 주어 공부할 것을 권했다.

십년 후, 범중엄은 태산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명한 스승이 ‘춘추’를 잘 강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그를 추천했는데, 그가 전에 자신이 후원했던 손씨 선비 바로 그였다.

호가 횡거(橫渠)인 장재(張載)는 신유학(新儒學)의 기풍을 일으킨 오대유종(五大儒宗)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 품은 뜻이 컸고, 군사 문제를 토론하기를 즐겼다. 어느 때 장재가 범중엄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나기를 청했고, 범중엄은 그를 만나자마자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아보고 군사 일에 대한 관심을 끊고 유학에 전념을 할 것을 권하며 ‘중용(中庸)’ 한 권을 주었다. 그때 이후 유학에 대한 탐구를 한끝에 장횡거는 대성하였다.

범중엄은 문장가로도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널리 알려진 ‘악양루기(岳陽樓記)’에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이렇게 썼다.

“외물로써 기뻐하지 않고, 나 자신으로써 슬퍼하지 않는다. 높은 벼슬로써는 백성을 근심하고, 낮은 강호에서는 임금을 근심한다. 나아감에도 근심이요, 물러남에도 근심이니, 어느 때 즐거울 수 있으랴.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거워한다.”

범중엄에 대해 역사서는 “안으로 강직하고 겉으로는 온화하며 백성을 두루 사랑했다. 인한 사람은 가까이하고, 선한 일을 즐거워하였으며, 널리 베풀기를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토록 베풀기를 좋아했던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집안에는 남겨놓은 재물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유산이 있었다. 하나같이 학문적 성취가 뛰어난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뒤이어 공정하고 청렴한 관리가 되었는데, 그것이 그가 세상에 남긴 훌륭한 재산이었던 것이다.

불교는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를 초극하고자 시작된 종교이다. 하지만 범중엄은 오히려 “나는 근심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비고뇌를 초극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먼저 불러들이는 사람이었다. 불교는 또한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종교이다. 하지만 범중엄은 자신의 ‘락’을 뒤로 미루고 천하의 ‘락’을 먼저 챙기고자 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범중엄의 처신은 불교 교리에 완전히 반대된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관점을 대승불교로 돌리면 범중엄은 불교 교리에 반대되기는커녕 보살도를 실제로 구현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고, 보살의 보살다움은 중생의 고통을 먼저 챙기는 것과 나의 열반을 뒤로 미루는 것에 기반해 있다. 대승보살의 삶은 범중엄 식으로 말해서 “중생의 고통을 먼저 근심하고, 나의 열반락을 나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정책을 행함에 있어서 범중엄은 불교를 배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사태를 바라보는 두 개의 채널을 가동할 필요가 있다. 한 채널에서 범중엄은 불교의 배척자이다. 그러나 다른 채널에서 그는 ‘숨어 있는 위대한 불제자’이다. 겉으로 불제자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불교를 파괴하는 사람과 겉으로는 불제자가 아니지만 실제로는 불교적인 삶을 산 사람, 반드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후자를 택하련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77 / 2019년 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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