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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기를 업은 여인

기자명 손태호

힘겨운 사람 손 잡아주려는 마음이 자비

영국인 엘리자베스의 채색목판화
일제강점기 동대문 인근 모녀 모습
한국인에 대한 연민 녹아있는 작품
우리나라 첫 크리스마스씰에 사용

엘리자베스 키스 作 ‘아기를 업은 여인’, 채색목판화, 원판크기 14.8 x 17.1, 1934년.
엘리자베스 키스 作 ‘아기를 업은 여인’, 채색목판화, 원판크기 14.8 x 17.1, 1934년.

설 명절이 바로 지났으니 아직은 겨울의 한 복판입니다. 올해는 유독 눈이 오지 않아 겨울 분위기가 조금은 덜하지만 겨울은 겨울인지라 연일 추위가 매섭습니다. 이렇게 추위가 찾아오면 환경이 우리의 활동에 영향을 주곤 합니다.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외부 활동도 자제하게 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도 미루게 됩니다. 뭔가 의욕적이기보다는, 늘 하던 일을 반복하는 소극적인 생활이 되기도 합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바로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아기를 업은 여인’입니다. 그림을 살펴보면 한 여인이 아기를 업은 채 언덕 위에 서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고 소나무 위에도 눈이 한 가득이니 분명 한겨울입니다. 여인 뒤로는 이층 누각의 대문이 있고 성곽길이 있으며 뒤로 높은 산이 있습니다. 먼저 이 그림의 장소는 어디일까요? 그 힌트는 바로 대문에 있습니다. 대문 앞으로 옹성이 있습니다. 옹성은 적의 침입 시 대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한양도성에는 동대문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동대문이며 옆으로 성곽은 광희문으로 이어지고 그 뒤에 큰 산은 남산인 것입니다. 남산에 해가 걸려 있어 이른 아침의 풍경으로 생각됩니다. 근경의 소나무와 여인은 동대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언덕으로, 지금의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이화동 벽화마을로 이어지는 어디쯤일 것입니다. 

엄마는 검정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있는데 아이는 색동저고리를 엄마는 흰색저고리를 입고 있습니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것으로 보아 설 명절입니다. 어머니와 아기 둘 다 머리에 모자를 쓰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우리 고유의 겨울모자인 ‘풍차’입니다. 풍차는 ‘풍뎅이’라고도 불렸는데 조선시대 추위를 막기 위해 남녀 모두가 착용했던 방한모로 모자 뒤의 길이를 길게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모양으로는 방한모의 하나인 ‘남바우’와 비슷한데 다른 점은 모자 양옆에 볼끼를 달아서 귀와 뺨, 턱까지 가릴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림에서도 모자 안쪽에서 나와 뺨과 턱을 감싸고 있는 볼끼가 있는데 볼끼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뒤로 젖혀서 뒤통수 쪽에 맸으며 후대에는 모자와 볼끼를 함께 재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남자용 풍차는 이 위에 관이나 갓을 쓰며, 여자용은 방한모 앞뒤를 장식 끈이나 술, 비취, 산호나 옥판 등을 달았는데 그림에 아기도 엄마와 같이 술 장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비록 추운 겨울이지만 아이를 업은 엄마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포근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채색목판화입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1887년 스코틀랜드 에버딘셔에서 태어나 자랐고 28세 동생이 있던 일본으로 와 동양미술에 눈을 뜹니다. 처음에는 캐리커처를 그려 단숨에 주목을 받은 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는 우끼요애라는 목판화에 심취해 여러 작가들에게 목판화를 배우고 수련합니다. 그 후 33살 때 동생 제시와 함께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할 겸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 해는 1919년 3·1운동이 시작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3월28일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한국의 모습에 매료되었습니다.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풍경화도 그리곤 했지만 그녀의 가장 큰 관심은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진솔한 한국인의 모습이었으며 그런 한국인을 폭압적으로 짓밟는 일본에 매우 분노하였습니다. 

그녀는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여러번 한국을 오가며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 ‘올드 코리아’라는 책을 발간하여 한국과 한국인이 얼마나 멋진 문화와 풍경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한국을 일본이 어떻게 억압하는지 설명하며 그런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책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책에서 그림 뒤에 그림의 설명이 있는데 그 글을 읽어보면 엘리자베스 자매가 얼마나 한국인의 모습을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한국 장롱은 이미 유명하지만, 정말 그것이 얼마나 유용한지는 한국 여자들이 그걸 사용하는 현장을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난다. 그림 속의 한국 여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직접 만든 옷들을 꺼내놓고 있다. 이런 옷들이 장롱 속에 차곡차곡 질서정연하게 들어 있는 광경을 보면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옷을 꺼낼 때에도 서두르는 법 없이 날렵하게 꺼내든다. 장롱 속에 이처럼 완벽하게 옷을 넣어두는 습관은 수백번 내려오면서 축적된 자기 절제의 상징이다.” -바느질하는 여자-  

엘리자베스 키스의 많은 그림 중 특히 이 작품은 좀 특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씰로 채택된 그림입니다. 당시 한국은 결핵으로 많은 어린이들이 사망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1932년 캐나다 선교사이자 의사인 셔우드 홀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씰을 제작하였는데 엘리자베스는 크리스마스씰 도안에 세 번이나 참여하였습니다. 그중 이 작품은 1934년 처음으로 참여한 작품으로 엘리자베스 키스의 한국인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그녀는 결핵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하루빨리 완쾌되길 바라며 추위 속에서 아이를 업고 있어도 결코 숨기지 못하는 한국 여성의 의젓함에 주목한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겨울을 피하지 못하듯이 어렵고 힘든 시기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럴 때 어느 누구라도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힘겨운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마음, 추위와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작은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마음. 저는 이런 마음이 바로 불·보살님의 자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힘겨운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자비가 아닐까요?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영문 성(Keith)을 중국식으로 바꿔 기덕(奇德)이라고 한자로 써놓은 것도 한국에 함께하겠다는 그녀의 의지입니다. 추운 겨울 아이를 업은 여인은 외롭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추위도 혼자서는 힘들어도 함께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추위는 바로 자비로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477 / 2019년 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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