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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불교양로원이 기독교계로 넘어간 사연

  • 교학
  • 입력 2019.02.22 10:32
  • 수정 2019.02.23 07:46
  • 호수 1478
  • 댓글 0

정상양·한규무 광주대 교수 조명
불자 이원직씨 1927년 8월 개원
전 재산 쏟아 붓고 불당도 마련
일제강점기 첫 재단법인 양로원
운영난 시달리다 개신교 넘어가
수용 노인들도 예불 대신 예배

독실한 여성불자로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해 양로원을 세웠던 이원직씨와 경성양로원. 매일신보 1928년 5월18일자에 '정한(靜閑)한 인왕산 아래 대자대비의 양로원'이라는 기사에 실린 사진.
독실한 여성불자로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해 양로원을 세웠던 이원직씨와 경성양로원. 매일신보 1928년 5월18일자에 '정한(靜閑)한 인왕산 아래 대자대비의 양로원'이라는 기사에 실린 사진.

1927년 8월1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설립된 경성양로원은 현재 서울 구기동 청운양로원의 전신이다. 일제강점기 전국 유일의 재단법인 양로원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양로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이 이원직(李元稙)이라는 독실한 여성불자의 원력으로 세워졌으며, 1930년대 우여곡절 끝에 기독교계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정상양 광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한규무 광주대 호텔관광경영학과 교수가 최근 ‘한국민족운동사연구’(96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이원직의 경성양로원 설립 배경 및 운영과 기독교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다뤄 눈길을 끈다.

당시 신문 보도와 조선총독부 문건 등을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1926년 7월, 51세였던 이원직씨가 자신의 전 재산인 2만여원을 희사하고 당국도 청운동에 국유지 2041평을 10년간 무상대여를 허가하면서 경성양로원 건립이 본격화됐다. 이 무렵 교사와 공무원 한 달 월급이 20원, 대졸 회사원의 월급이 30원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2만원은 엄청난 액수였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은 이씨의 양로원 건립을 비중 있게 다뤘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씨는 30~40년 전부터 불교를 성심으로 믿었고 평소 부처님의 자비심을 본받아 모든 일을 처리함으로써 ‘생불’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이씨는 살아있는 날까지 사회공익사업에 여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평생 모은 재산 전부를 들여 경성양로원을 건축하고 그곳에 부처님 정신에 입각해 의지할 곳이 없는 불쌍한 노인을 돌볼 계획이었다. 신문들은 이씨를 땀으로서 성공한 ‘입지전중(立志傳中)의 한 사람’으로 지역에서도 명망이 크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이씨가 경기도 연천군에 있던 자신의 전답 5만5000여평을 기꺼이 내놓은 사실과 함께 “미약한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완전한 사업을 하여 갈 수 없으니 오직 사회의 많은 동정과 후원을 바랄 따름입니다”라는 이씨의 호소도 기사에 담았다.

1928년 3월20일 중외일보가 경성양로원을 방문하고 쓴 기사에 따르면 인왕산에 자리 잡은 경성양로원은 기와를 올린 이층집으로 10여개의 방이 마련된 여성전용 양로원이다. 아래층에는 75~85세의 노인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했고 환자를 위한 병실, 장례를 치를 수 있는 호상실(護喪室), 원장실이 있었다. 이층에는 부처님을 모신 불당이 있어 “매일 새벽 불공과 극락의 도를 닦는 10여명의 노부인들이야말로 가련한 운명의 ‘히로인’들이라고는 하여도 오히려 무한히 행복스러울 것이다”라고 호평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 머물렀던 이들은 대한제국 황실의 궁녀[女官]들이었다. 조선시대 불교를 지탱했던 큰 축이 신심 깊은 왕비와 궁녀 등 궁궐의 여인이었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을 수 있다. 논문을 쓴 정·한 교수가 이원직씨를 궁녀일 수 있다고 추정한 것도 경성양로원의 첫 수용자들이 대한제국 궁녀 출신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당시 불교계는 복지사업에 눈을 떠갈 무렵이었다. 일본 동본원사 경성별원이 1908년 서울에 구호소를 설치해 행려병자들을 수용해 구제사업을 벌였다. 이곳의 수용인원이 점차 늘자 서울지역 불자들이 자체적으로 1917년 4월 경성불교자제회를 결성해 진료에 적극 나섰다. 또 1921년에는 이를 확장해 노인들을 돕는 양로구조부(養老救助部)를 설치하고, 1925년 12월에는 양로원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독실한 불자였던 이씨의 경성양로원 운영에도 불교계 인사들이 동참했다. 1929년 2월 경성양로원이 재단법인 허가를 받을 무렵 조선불교청년회 간부로 활동했던 김태흡, 조선불교회 발기인으로 이윤현, 이능규 등이 이사로 참여했다.

경성양로원에 거주했던 노인들. 출처=청운양로원 홈페이지
경성양로원에 거주했던 노인들. 출처=청운양로원 홈페이지
1927년 설립된 경성양로원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존속했고, 1952년 12월 청운양로원으로 개칭했다. 이어 1960년 9월에는 청운동에서 현 구기동으로 옮겨졌다. 사진은 현 청운양로원. 출처=청운양로원 홈페이지
1927년 설립된 경성양로원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존속했고, 1952년 12월 청운양로원으로 개칭했다. 이어 1960년 9월에는 청운동에서 현 구기동으로 옮겨졌다. 사진은 현 청운양로원. 출처=청운양로원 홈페이지

그런데 1933년 12월25일 경성양로원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이날 열린 평의원회에서 임원진이 대폭 교체됐는데 불교계 인사들은 모두 빠지고 이사장 오긍선을 비롯해 윤치호, 김일선 등 기독교 인사들이 이사와 감사를 모두 맡았다.

경성양로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한 교수는 이사진 교체를 심각한 재정난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양로원 운영을 위해서는 매년 약 3000원이 필요했다. 기본자산이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돈이 들어가는 일이기에 기부나 찬조금이 없이는 운영이 어려웠다. 재단법인 설립 직후 운영진들이 기부금 모금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불교 인사들은 외부의 비판이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양로원에서 재와 각종 행사를 열어 운영비를 충당하려 했다. 하지만 갈수록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자 그곳 노인들을 보살필 수 있는 새로운 운영진을 모색해야 했고 결국 기독교계 인사들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막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경성양로원에서 불당은 사라졌고, 이곳 노인들도 매일 아침 ‘불전에 염원’하는 대신 ‘매일 아침 예배’를 드려야했다. 이후 경성양로원은 1952년 청운양로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1980년대 잡지에 “이곳에 있는 할머니들 거의 다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고 쓰일 정도로 1980년대까지 사실상 기독교계 양로원으로 이어져왔다.

우바이 이원직씨의 신심과 원력으로 식민지시대 방치된 노인들이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양로원이 세워졌고 그것이 어떤 형태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은 자못 의미가 크다. 그럼에도 당시 불교계가 경성양로원 운영을 접어야했고 그에 따라 이씨가 내세웠던 부처님의 자비정신까지 퇴색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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