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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동안거 해제 법어

기자명 주영미
  • 교계
  • 입력 2019.02.24 22:56
  • 수정 2019.02.25 17:36
  • 호수 1478
  • 댓글 0

“마음속 생각 놓아 버리고 생각 아닌 마음 보라.”

지유 스님.
지유 스님.

오늘 벌써 동안거 결제를 하고 마지막 해제 날에 딱 부딪혔습니다.

석 달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어제, 그저께 결제를 한 것 같은데 벌써 해제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리고 잠시 머릿속으로 돌이켜 보면, ‘일념(一念)이 무량겁(無量劫)’, 무량겁이라는 긴 시간이 한 생각 속에 있다는 말도 떠오를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본즉, 시간은 시작도 없이 흘러왔고 앞으로도 끝없이 흘러간다고 하더라도 나 자신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어디서 오지도 않고, 새로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영원히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시간은 바뀌고 있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물체는 실체 없이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 속에 오로지 모양은 없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마음 하나가 끝없는 과거와 끝없는 미래에 걸쳐서, 그 속에 온갖 모습들이 있었지만, 한 번도 생 한 일도 없고 다한 일도 없으며 달라진 일도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각자 자기 속에 갖추고 있습니다.

결제 후 석 달 동안 각자 자기 나름대로 노력하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다면 불법(佛法)의 수행(修行)에 있어서 첫 번째는 무엇인가. 불법은 남의 것을 구하거나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수없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수없이 살아갈 것이다, 그런 자기가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이며 지금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볼 때, 자신은 무엇입니까. 앞서 불법은 남의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자신의 마음과 마음에 따라오는 육신, 몸과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몸은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으니까 “자세를 바르게 하시오.”하고 지적해 줄 수 있는데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비뚤어졌는지 옆에서 수정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잘못되고 괴로운 것은 본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괴로움이랄지 마음이 산란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본인 자신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이 몸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서, 결국 없어집니다. 몸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몸이 생겼다고 해서 같이 생기거나 몸이 사라진다고 해서 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육신에 사로잡혀서 눈만 뜨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산란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 문제 해결을 위해 출가를 하셨는데 그 해결을 어떻게 하셨는가. 처음에는 육체적으로 많은 고행을 하셨지만, 그것은 헛된 일인 줄 알고 마음을 돌이켜서 마음을 깨달음으로 생로병사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깨닫고 보니 생사가 본래 없다, ‘본무생사(本無生死)’입니다. 났지만 난 것이 아니고 없어졌지만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생사 속에 불생불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을 깨닫고 보니 깨달은 자기 자신만 불생불멸의 마음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중생(衆生),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미물 곤충에 이르기까지도 불생불멸의 마음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존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망상 집착으로 인해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보배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濟度)한다는 것은 각자 마음속에 있는 구름과 같은 번뇌 망상, 쓸데없는 생각을 탁 털어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목표로 삼고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불교 경전을 보며 공부를 하였고, 경전을 보았으면 실천에 옮기는 것이 수행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마음부터 먼저 알아야 하는데 마음이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오늘은 책을 보다가 좋은 구절이 있길래 이것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 책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가 하면 우리는 보통 깨달은 사람, 깨닫지 못한 사람을 구분할 때 깨달은 사람도 사람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깨달았다는 것은 ‘아는 것’이라 하고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헤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깨닫지 못한 상태인 미(迷)와 깨달음의 상태, 오(悟)에 대해서 나옵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서, 정말로 마음을 깨닫고자 의심도 하고 애를 쓴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이 공부해 온 것과 비교해 보고 참작하며 이 구절을 보면 깨닫지 못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 소리를 듣고 깨닫지 못했다면 열심히 깨치고자 하는 열의가 너무 미약하거나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판단이 됩니다. 어떤 말이 나오는지 꿰뚫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미 했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상태인가. 마음속에 생각이 가려서 생각 아닌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마음속의 생각을 놓아 버리고 생각 아닌 마음을 본 것을 말한다.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마음을 보지 못하는 원인은 마음속에 생각이 가려서이니 생각을 놓아 버리면 바로 생각 아닌 마음이 된다.
생각 아닌 곳에 능히 감각 할 줄 아는 영지(靈知)가 불생불멸의 자기요, 생사와 상관없는 영원한 안식처다. 생각하고 원하고 있던 영원불멸의 마음을 사람마다 갖추어 있고 내지 미물 곤충에 이르기까지 일체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중생은 마음속에 망상 집착이라는 구름이 가려서 이 좋은 보배를 보지 못하고 환과 같은 생사에 윤회하여 시름 하는 것이다.”

욕심도 생각이요 감정을 일으키는 것도 생각이요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하는 것도 생각이요 도를 얻겠다는 것도 생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 마음속을 가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을 갖고 공부를 해보겠다 하면서 마음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자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까 생각 아닌 자기 본심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마음 자체가 생각한 것입니다. 마음이 자기 속에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에 가려져서 그 장애물 때문에 내가 보고자 하는 마음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 아닌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울, 부산, 남대문, 불교, 진리 등 이처럼 온갖 생각들을 깊이 살펴보면 마음속의 그림자요 환상입니다. 도를 깨닫겠다는 것도 환상입니다. 진리를 터득하겠다는 생각도 환상입니다. 반면, 도나 진리는 환상이 아닙니다. 생각을 놓아 버리면 환상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환상 아닌 마음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멍청하게 앉아있거나 깊은 잠에 빠진 상태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차가우면 찬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것을 신령스럽게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똑똑하게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어떤 선사가 화두를 들다가 아무리 깊이깊이 생각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도는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말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이 아니고 생각이 아닌 곳을 생각을 짊어지고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기진맥진해져서 일체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떨어져 버렸습니다. 생각 아닌 마음이 되었을 때, 그렇게 되어도 홀연히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순간을 놓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종소리가 땅 하고 나자 ‘아!’, 누가 알아차렸습니까. 내가 알아차린 것입니다. 여태까지 수없이 종소리를 들었지만 왜 몰랐는가. 마음속에 생각이 가려서 생각 아닌 마음을 미처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신령스럽게 알고 있는 것을 영지라고 했습니다.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인 줄 알고, 차가우면 찬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에게 달려온 도명 선사에게 육조 스님은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이라,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심에 입에 물이 들어오자 차가우면 저절로 차가운 줄 알고 더우면 저절로 더운 줄 아는 것, 바로 그것 아닙니까.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것을 깨달았고 나도 이 문중에 와서 이것을 깨달았고 그대도 지금 알았노라. 이것은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누구든지 차가우면 찬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안다. 그러나 이것인 줄 모르고 이것 외 다른 것이 있다고 보고 있다.” 깨달은 사람만이 확신하고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산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는 피식 웃고 맙니다.

결국, 우리가 자기 속에 있는 생각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자체가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마음 자체가,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 하고 한 생각 돌이켜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자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듣고 눈을 통해서 형상을 보고 피부를 통해서 차갑고 더운 줄 알지만 결국 귀가 듣고 있거나 눈 알맹이가 보고 있거나 피부 껍질이 차갑고 더운 줄 아는 것이 아니라 귀도 눈도 피부도 아닌 것이 바깥의 소리를 다 듣고 빛을 보고 환경을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알다 보니 이러쿵저러쿵 사량분별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확실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깨달아야 한다는 마음 자체, 모든 고통이나 괴로움, 생로병사라고 하는 일체 생각을 놓아 버리면 끝없는 과거로부터 생사윤회가 일시에 끊어져 버립니다.

옛 선사께서도 “보고 있는 놈을 돌이켜 보라.”, “듣고 있는 놈을 돌이켜 보라.”고 하셨습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바깥으로 아무리 찾아도 구하는 물건은 나오지 않습니다. 바깥으로 비추고 있는 것을 안으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소리를 듣고 있는 놈은 소리가 아닙니다. 바깥의 물체를 보고 있는 놈은 물체가 아닙니다. 바깥에 찬 바람이 부는 줄 느끼는 마음은 차가운 것이 아닙니다. 소리만 듣지 말고 소리 아닌 소리를 들을 줄 아는가, 모양을 보기만 하지 말고 모양 아닌 것을 볼 줄 아는가.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잠시 각자 벽을 향해서 조용히 앉아 볼 때, 내가 왜 벽을 보고 앉아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이라고 합니다. 벽을 대하면서 마음을 본다는 것입니다. 벽을 보는 이유는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벽에서 마음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벽을 향해서 나를 찾는다고 하면 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벽은 내가 아니고 상대입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상대를 대할 때, 이때 어떤 것이 자기인가 보면 상대를 대하고 있는 이것이 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소리를 들을 때 소리를 듣고 있는 이것이 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상대는 소리요 물건이지만 나는 소리도 아니고 물건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온갖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와 벽 사이가 모든 생각들로 가로막혀서 벽이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딱 놓아 버리면 벽이 저절로 눈에 들어옵니다. 모든 생각을 탁 놓아 버리면 종소리도 정확하게 귀에 들어옵니다. 일체 생각을 놓아 버리면 마음에 장애물이 없으니까 소리와 빛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청산첩첩미타굴(靑山疊疊彌陀窟)이요, 창해망망적멸궁(滄海茫茫寂滅宮)이라, 마음속에서 오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물념래무가애(物物拈來無罣碍), 오고 감에 걸림이 없습니다. 기간송정학두홍(幾看松亭鶴頭紅) 그런데 사람들은 학 머리가 빨갛다는 것을 얼마나 보는가. 그것을 똑똑히 보라. 이 구절도 그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이라는 그림자에 사로잡힙니다. 마음속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놓아 버리면 생각 아닌 마음이 드러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절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너무 쉽고도 쉽습니다. 너무 쉽기에 어렵습니다. 찾을 것도 깨칠 것도 얻을 것도 없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깨달았다고 하는 진리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으므로 수행자가 거기, 즉 반야에 의지한다고 하였습니다.

각자 이런 소리를 듣고 정말 그 말이 맞는지 조용히 벽을 향해 앉아서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생각을 놓아 버리기도 하고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러면 오늘도 해제 날이기도 하니 마지막으로 지난번에도 소개했던 ‘임제록(臨濟錄)’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임제 선사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들이 무엇인가 진귀한 것이 있지 않나 이런 생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옛 조사 스님께서도 ‘야, 이놈아. 대장부가 머리 하나 있는데 다시 머리를 찾고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이 말을 듣고 당장 자기에게 돌아와서 다시 달리 구하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 이대로 부처와 조사와 똑같은 줄 알고 바로 이 자리에서 무사대안락(無事大安樂)이 되었다면 그것을 법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이여. 나는 오늘 사정상 부득이해서 이런 말을 지껄이고 지저분한 말을 하고 있지만, 착각하지 말아라. 나의 소견에서 보면, 실제는 아무것도 없다.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면 되고 앉고 싶으면 앉으면 된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간단한 말 같지만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법문은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이 2월19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경선 스님) 보제루에서 봉행된 ‘불기 2562년 동안거 해제 법회’에서 설한 내용입니다.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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