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법성게’ 제17구 :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29. ‘법성게’ 제17구 :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 해주 스님
  • 승인 2019.02.26 13:37
  • 호수 147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理)와 사(事)가 비록 섞이지 않으나 그윽하여 결코 분별이 없다

이사명연무분별은 총론이니
이와 사 벗어나지 않기 때문

연기가 성품 없는 것이 ‘이’
성품 없는 연기가 ‘사’이니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고 함

이와 사 명연무분별하기에
사와 사도 또한 이와 같아

​​​​​​​진성이 연을 따라 이뤄지니
연기 된 존재의 세계는 참

‘법성게’ 제17구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은 다음 구절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과 함께 진성수연의 경계를 총체적으로 결론 지어 말씀한 연기분의 총론(總論)이다. 의상 스님이 스스로 ‘법성게’ 30구를 분과한 내용을 인용하여, 나누어진 자리행의 상호 관련성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글(법성게)에 7언 30구가 있다. 이 중에 크게 나누어 셋이 있으니, 처음 18구는 자리행에 근거한 것이고, 다음 4구는 이타행이며, 다음 8구는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을 변별한 것이다.” 

초문(자리행)에 둘이 있으니, 첫4구는 증분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두 번째, 다음 14구는 연기분을 나타낸 것이다. 이(연기분) 가운데 처음 2구는 연기의 체를 가리킨 것이다. 둘째, 다음 2구는 다라니의 이(理)와 용에 근거해서 법을 포섭하는 분제를 가린 것이다. 셋째, 다음 2구는 사법[事]에 즉하여 법을 포섭한 분제를 나타낸 것이다. 넷째, 다음 4구는 시간[世時]에 근거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를 보인 것이다. 다섯째, 다음 2구는 계위[位]에 근거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제를 나타낸 것이다. 여섯째, 다음 2구는 위의 뜻을 총체적으로 논한 것[總論]이다. 비록 6문이 같지 아니하나 오직 연기다라니법을 나타낸 것이다. 

이를 간략히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법성게’에서 연기분의 총론이란 (표)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연기분인 교분(敎分)을 결론 맺는 것이다. 증분은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고 맺고 있다.
위에서 증분과 연기분에 해당하는 ‘법성게’ 구절의 경증으로 보이는 ‘화엄경’ 문구를 약간 소개했는데, 각 구절에 해당되는 경문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이 총론의 경우처럼 ‘화엄경’ 전반에 걸쳐있다고 하겠다. 단, 크게 나누어 보아 불세계가 증분이라면 보살세계는 연기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라는 “이사명연무분별”을 총론이라 한 것은, 연기 제법이 비록 많은 법이 있으나 이와 사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진기) 

여기서 ‘이’는 무엇이고 ‘사’는 무엇인가? ‘이’와 ‘사’가 어째서 ‘명연무분별’인가? ‘이’는 이법이고 원리이고 체성이며, ‘사’는 현상이고 사건이고 사물이다. ‘법성게’에서 “생사열반상공화” 다음에 “이사명연무분별”을 읊고 있다. 그래서 ‘법기’에서는 ‘생사는 성품이 없으니 열반으로써 성품을 삼고 열반은 성품이 없으니 생사로써 성품을 삼는 것이니, 곧 생사와 열반이 성품이 없는 것은 이(理)가 되고 성품이 없는 생사와 열반이 사(事)가 된다. 그리고 연기가 성품이 없는 것은 이이고, 성품이 없는 연기는 사이다. ‘이’ 역시 진성의 이이며, ‘사’ 역시 진성의 사이다. 그러므로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가 곧 사이고 사가 곧 이이며, 이 가운데 사이고 사 가운데 이이다. 의상 스님의 강설을 받아 적은 ‘지통기’와 그 이본으로 간주되는 ‘화엄경문답’에서는, 보법(普法) 즉 화엄의 이사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보법에서 사(事)와 이(理)란, 이가 곧 사이고 사가 곧 이이며 이 가운데 사이고 사 가운데 이이므로, 즉(卽)과 중(中) 가운데 자재하다. 비록 사와 이가 섞이지 않으나 그윽하여 둘이 없다.”

이와 사의 경우처럼 사와 사도 역시 그러하다. 심(心)으로 말하면 일체의 법이 심 아님이 없고, 색(色)으로 말하면 일체의 법이 색 아님이 없다. 나머지 일체의 인과 법, 교와 의(義) 등, 모든 차별법문도 모두 그러하다. 왜냐면 연기다라니의 무장애법은 하나의 법을 들면 일체를 다 거두어 걸림 없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없기 때문이다. 화엄보법에서 이와 사가 상즉하고 상입해서 명연무분별하니 사와 사도 그러하다. 그것은 하나를 들 때 일체를 다 거두어 무측(無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이를 또한 수즉수(須卽須)의 도리로 설명하고도 있으니, 필요한 연을 따라 이와 사를 달리 말할 수 있다. 오척(五尺)으로 말할 경우, 오척이 사라면 그 무애는 이(理)를 뜻할 수도 있고 이것과 반대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원통기’에서는 티끌[塵]과 시방[十方], 순간[念]과 겁(劫) 등이 모두 사법(事法)이지만 즉(卽)과 입(入)이 걸림 없다는 것은 이(理)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오직 이(理)를 기준으로 한다면 한 맛이기 때문에 즉·입(卽入)할만 한 것이 없으며, 만약 오직 사를 기준으로 하면 서로 걸리기 때문에 즉·입할 수 없으니, 이와 사가 그윽하여 다르지 않음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걸림 없음을 얻기 때문에 “이사명연무분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이러한 “이사명연무분별”을 이사무애(理事無礙)·사사무애(事事無礙)·이이무애(理理無礙)의 셋으로 밝히고 있다. 서로 상즉하고 상입하므로 무애이다. 이이무애는 의상 스님의 독특한 무애관으로 간주되는데, 사가 이이고 또 사 중의 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상 스님은 사사무애의 십현문을 일승이 삼승과 다른 이유로 들고도 있다. 십현문은 육상원융과 아울러 화엄의 사사무애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연기문이다. 
 

문수보살과 복성동방대탑. 화엄경 제62권 변상도. 봉녕사소장

십현문 가운데 동시구족상응문이 총상이라면 나머지 아홉은 별상으로서 총별원융이다. 의상 스님은 동시구족상응문이 인법(人法)·이사(理事)·교의(敎義)·해행(解行)·인과(因果) 등, 열 가지[十門]를 갖춘다고 한다. 낱낱 사법에 이 열 가지가 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하는 것이다. 이 열 가지는 십보법(十普法)이라고도 하는데, 반드시 이 열 가지만이 아니라 서로 반대되거나 대립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걸림 없음을 뜻한다. 열은 원만수이기 때문이다. 별상의 아홉 연기문도 그 가운데 십보법을 갖춘다. 단지 인다라망경계문은 비유를 따라 다를 뿐이며,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은 연(緣), 미세상용안립문은 연의 상(緣相), 십세격법이성문은 시간[世],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은 사[事], 일다상용부동문은 이(理), 제법상즉자재문은 용(用), 수심회전선성문(隨心廻轉善成門)은 마음(心), 탁사현법생해문은 지(智)를 따라 다를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비밀은현구성문은 숨은 것과 드러난 것이 함께 이루어져 있는 문이고, 제장순잡구덕문은 모든 창고(십무진장)에 순수한 것과 잡박한 것이 공덕을 갖춘 문이다. 일다상용부동문은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용납하되 같지 않은 상입문이고, 제법상즉자재문은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한 문이다. 수심회전선성문의 수심은 유심(唯心)이니 마음따라 일체가 이루어짐을 말하며, 탁사현법생해문은 현상계 존재에 의탁하여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게 하는 문이다.

이 십현문은 후에 고십현문이라 불리게 된다. 법장 스님 이래 그 명목이 약간 수정된 신십현문에는 유심회전선성문과 제장순잡구덕문 대신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과 광협자재무애문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비밀은현’의 자구를 수정하여 ‘현밀은료’로 바꾸었다.   

‘주와 반이 뚜렷이 밝아서 덕을 갖춘 문’과 ‘넓고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 없는 문’의 둘로 변경된 것은, 십현문이 이사무애가 아니라 사사무애임을 더 확실히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 마음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단지 십문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문에 다 해당되는 점에 주목한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십현연기의 사사무애도, 진성수연의 연기 제법을 총체적으로 결론지은 “이사명연무분별”의 경계이다.

그래서 ‘법계도주’에서는 “이(理)를 설하고 사를 설함이 비록 천 가지가 있으나, 깊고 깊은 진성과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진성의 이는 묘용이 항상 그러하고 진성의 사는 법과 법이 항상 원융하다” 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와 사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불이(不二) 경계로 나타낸다. 설잠 스님은 이어서 ‘연기할 때에 분명 자성이 없으나 자성이 없는 곳에서 언제나 연기하는 이러한 도리에 대해 ’증도가‘의 말을 빌어서 “하나의 지위가 일체의 지위를 구족함이니 물질[色]도 아니고 마음[心]도 아니며 행하는 업[行業]도 아니다”라고 맺고 있다. 

이상 언급한 “이사명연무분별”의 뜻을 부연한다면, 진성수연의 연기제법은 이사무애만이 아니라 이이무애이고 사사무애이다. 사사무애란 모든 현상계의 법과 법 일체가 진성으로서 상즉하고 상입하여 걸림 없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이러한 무애도리로 연기분을 총체적으로 결론 맺고 있다. 그러므로 “이사명연무분별”은 현실대긍정의 연기문이다. 연기된 모든 존재는 진성이 연 따라 이루어진 것이니 그 존재세계는 참된 세계인 것이다. 수심(隨心)의 심이 진성이며 여래장자성청정심이다. 더 나아가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나 만덕을 구족하고 있는 여래성기구덕심(如來性起具德心)과 다르지 않으니, 진성이 바로 법성인 것이다. 진성수연의 연기가 법성원융의 성기(性起)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