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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학림, 일제강점기 만세운동 확산 구심점”

  • 교학
  • 입력 2019.03.01 18:55
  • 수정 2019.03.01 20:40
  • 호수 1480
  • 댓글 0

불교사회연구소 3·1운동 조명
지방학림 소속 엘리트 불자들
독립선언문 사본·태극기 제작
지방만세운동 확산의 도화선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불교사회연구소가 2월27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불교계의 3·1운동과 항일운동’ 세미나를 개최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불교사회연구소가 2월27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불교계의 3·1운동과 항일운동’ 세미나를 개최했다.

1919년 3월25일, 문경 김룡사로 향하는 전장헌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그의 구두 속에는 3월1일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뿌려진 독립선언문 한 장이 들어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독립선언문을 김룡사에 전해야했다. 김룡사의 공비생으로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던 전장헌의 귀향길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무사히 김룡사에 도착한 전장헌은 김룡사지방학림에 재학 중이던 스님·청년들과 뜻을 모아 독립선언문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4월13일, 김룡사지방학림 산문을 나선 30여명의 학인들은 경북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서울중앙학림을 비롯해 각 지역의 사찰들이 운영하던 지방학림들이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촉발된 3·1만세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거점이 되었음을 조명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불교사회연구소가 2월27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한 ‘불교계의 3·1운동과 항일운동’ 세미나에서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만해 스님과 중앙학림 그리고 지방학림으로 이어지는 연결성이 3·1운동 확산의 도화선이 됐다”며 “지방학림은 만세운동의 거점이었다”고 강조했다. 학림은 강원과는 달리 젊은스님들과 청년들에게 근대교육을 하던 사찰의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서울의 중앙학림을 비롯해 각 지역의 중심사찰들이 운영하던 지방학림은 3·1만세운동 이후 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간 주목받지 못해왔다.

한 교수는 이날 ‘김룡사의 3·1운동’ 발표를 통해 김룡사에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이 경북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조명했다. 중앙학림 학인이었던 전장헌의 도착을 시작으로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던 김룡사지방학림 학인들의 시도는 학생들의 안전을 우려한 김룡사 주지 혜옹 스님의 간청으로 중단됐지만 학인들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20년 학인들은 순회강연단을 조직, 예천 포교당에서 강연회를 열어 민족단결을 주장하기도 했다.

한 교수는 “김룡사가 펼친 근대교육 역시 3·1운동이 지닌 민족의 자주자립정신과 맥을 같이한다”며 “이후 김룡사는 독립군의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3·1운동 정신을 지속해나갔다”고 밝혔다.

최화정 효당본가 반야로 차도문화원 사무국장

이날 세미나에서 최화정 효당본가 반야로 차도문화원 사무국장은 해인사지방학림에서 진행된 3·1운동을 재조명했다. 해인사지방학림에서 교사로 활동했던 초월·포광 스님 등을 비롯해 정광호 등 이곳 출신들이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며 독립선언서가 해인사에 도착한 이후에는 극락전 밀실 등에서 등사된 3100여장의 독립선언서가 지방에까지 배포될 수 있었다는 것. 최 국장은 “박달준, 김봉률, 김장윤, 김경훈 등의 군자금 모금 활동기록들이 꾸준히 나온다. 이들은 해인학림의 학생들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귀국했다”고 밝혔다. 또 학인들은 각 지방으로 파견되거나 흩어져 현지에서 항일투쟁을 이어갔으며 이후 만주와 일본 등 국외로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고 강조했다.

최 국장은 “근대적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던 해인사지방학림은 민족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3·1운동의 바탕이 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러한 바탕과 3·1운동으로 촉발된 불교의 근대적 자각이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의 참여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지방학림은 3·1운동 이후에도 민족정신을 계승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가 발표한 ‘통도중의 민족교육과 폐교사건’에 따르면 통도사가 운영했던 통도중(통도사 전수학원)은 교사였던 스님 2명이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고 1944년 결국 폐교됐다. 김 교수는 “일제 황민화 정책이 강화되던 시기 발생한 이 사건은 사찰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이한 항일 운동사의 단면”이라며 “통도중은 통도사지방학림을 계승한 학교라는 점에서도 젊은 스님과 청년불자로 구성된 지방학림이 독립운동사에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불씨가 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승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학예연구사

이승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학예연구사는 “사찰의 3·1운동 참여 경향을 보면 규모나 사격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지방학림과 같은 근대교육기관을 갖추었는지 여부”라며 “지방학림은 스님들의 사회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민족의식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임은호 eunholic@beopbo.com

[1480 / 2019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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