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근세불교 중흥 이끈 용성 스님을 만나다
독립운동·근세불교 중흥 이끈 용성 스님을 만나다
  • 심정섭 전문위원
  • 승인 2019.03.04 11:08
  • 호수 14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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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평전’ / 김택근 지음·불심도문 스님 감수 / 모과나무

용성 스님의 삶·사상 등 총망라
“용성 선사 공로 잊지 못할 것”
백범 김구 대각사서 직접 증언
출·재가 모두 ‘선계 거벽’ 칭송
역경·대각교 운동 구체적 실현
‘용성 평전’
‘용성 평전’

“용성은 태화관에 들어서려다 탑골공원을 돌아봤다. 장소가 바뀐 줄도 모르고 군중이 민족대표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원은 물론 사동과 종로거리에도 사람물결이었다. 민심은 분출구를 찾는 용암처럼 이글거렸다.”

1919년 3월1일, 용성 스님은 한참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다 태화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민족대표로 서명한 33명 중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만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선언식이 끝나갈 무렵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치면서 고난은 시작됐다.

용성 스님은 서대문 감옥에 갇혀 가혹하기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문과 수모를 당했음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의연했다. 독방을 선방으로 삼아 경을 읽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혹독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시도 때도 없는 협박과 조롱을 당하며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면서도 수행자의 굳건한 결기를 잃지 않았던 용성 스님은 1921년 5월5일, 형기를 마치고서야 지옥도에서 벗어났다.

스님의 독립운동은 출소 후에 은밀하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일이 기록으로 충분하게 남기지도 않았으나, 1945년 12월12일 백범 김구 주석을 비롯해 황학수, 이시영, 김창숙 등 30여 명이 대각사를 찾아 용성 스님 영정 앞에 향을 사르고 고개를 숙인 데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날 백범이 “선사께서 독립자금을 보내주지 않았던들 임시정부를 운영하지 못할 뻔했다. 이뿐만 아니라 만주에 대각사와 선농당을 지어 독립 운동하는 분들을 사찰에 숨겨주고, 그 가족들이 농사짓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공로는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한 말 역시 그 증거 중 하나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용성 스님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용성 평전’이 출간됐다. ‘김대중 평전’ ‘성철 평전’을 펴내며 한국 근현대사는 물론, 불교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보여준 김택근 작가가 2년여 동안 용성 스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흩어진 흔적들을 하나씩 찾아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한국근현대사는 3·1운동 전과 후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3·1운동이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혁명’이라고 강조한 작가는 그 혁명에 앞장선 용성 스님의 활약을 검증하고 확인해 펼쳐 보이는 한편, 스님이 당시 이 땅에서 존경받던 선승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스님은 열여섯에 해인사 극락암에서 정식으로 출가 득도했다. 목숨을 건 용맹정진으로 확철대오한 스님의 명성은 선지식들 사이에 자자했고, 한암 스님은 법을 구하는 이들에게 “대각사 용성을 찾아가라”고 할 정도로 용성 스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스님의 선지는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에서 “당시 선계를 돌아보면 모두 용성을 거벽으로 추대한다”는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용성 스님은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둥으로 활약하고, 불교의 지성화·대중화·생활화를 견인했던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였다.(위) 스님이 저술·번역한 원고와 책.(아래)

스님은 ‘선’을 강조하면서도 일반 대중들에겐 눈높이에 맞춰 ‘염불’과 ‘주력’에 전념해 신심을 다지고 부처님 가르침에 다가설 수 있도록 배려하는 따뜻한 선지식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옥고를 치른 이후엔 “대중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이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경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무섭도록 역경불사에 매진했다. 서대문 감옥에서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이들이 한글로 된 책으로 공부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본 충격 때문이었다. 그때 대중들이 읽고 익힐 수 있는 경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스님은 법당에서 풍금소리와 함께 울리는 찬불가를 반대하고, 천한 언문을 쓴다고 타박하는 기득권의 터부에도 불구하고 “한문을 안다고 종교의 진리까지 아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반드시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바꾸는 일을 하겠다”는 원을 굳건히 하고, 1922년 ‘신역대장경’ 발간을 시작으로 1925년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를 시작할 때까지 여러 경전을 한글로 번역해 2만여 권을 전국에 배포했다. 

스님은 또 1922년 5월 종로 봉익동에 대각교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대각교 운동을 구체화했으며, 1927년 불교혁신을 위한 대각교를 공식 선언했다. 스님이 주창한 대각사상은 ‘인간의 근본 심성을 자기 스스로 깨치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도 깨치게 하는 자각각타가 둘이 아니기에 원만하므로 구경각하다’는 것이었다. 연변에 대각교당을 설립한 것도 이때였다. 이후로도 역경과 참선지도를 하며 선농일치의 삶을 보이며 후학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말년에 이르기까지 대중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고구정녕 일러주던 스님은 1940년 4월2일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이 다 고요하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77세, 법랍 61세로 세연을 마쳤다.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용성평전’은 “아수라장을 불국토로 만드는 일, 그것은 그나마 나라가 있어야 가능했다. 나라가 없으니 백성의 눈물이 강을 이뤄도, 그 강물이 흘러갈 곳”이 없음을 절감하며 이 나라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둥으로 살았고, 불교 내적으로는 불교의 지성화·대중화·생활화를 이끈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 용성 스님의 삶과 사상,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서 스님의 삶과 가르침을 오롯이 새길 수 있는 ‘용성 평전’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또한 불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장군죽비에 다름 아니다. 3만원.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479 / 2019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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