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대각사 주지 동봉 스님

킬리만자로에 ‘한글 반야심경’ 울리게 한 아프리카 최초 전법승

학업포기·머슴살이 인생 
진리·지식 목말랐던 청년
“공부할 수 있다”한마디
푸른 꿈 이어가려 출가

“불교씨앗 심겠다” 대원력
홀로 바랑메고 아프리카로 
30에이커 조계종에 기증
현지에 농업기술대학 우뚝

​​​​​​​전법게·‘통현 화엄경’ 내려준
은사 고암스님 뜻 깊이 새겨
내·외전 섭렵하며 많은 저술
“당신이 부처” 전법에 매진

“욕심이 아예 없다면 공동체는커녕 제 어깨에 올려 진 삶의 무게도 감당하기 어렵다”는 동봉 스님은 “다만, 불자라면 자신에게만 치중할 수 있는 욕심을 최대한 선심·공심으로 돌려놓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남수연 기자

만년설의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Kilimanjaro·5895m)는 ‘하얀 산’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제작(1402)된 현존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킬리만자로는 ‘달의 산’으로 등장한다. 인류에게 ‘빛나는 산’으로 다가왔던 태산이다. 

아프리카 대륙이 뿜어내는 원초적 힘과 고독을 느껴보려 동봉 스님도 저 산으로 걸음 했었다. (2004.11) 그러나 정작 여행 중에 마주한 건 아프리카 53개국 어디에도 한국불교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땅에 “불교 씨앗 한 알이라도 심겠노라!” 다짐하며 이듬해 다시 탄자니아로 들어갔다.(2005.3) 킬리만자로 최고봉인 키보봉으로 향하는 코스는 모두 7개인데 마랑구 게이트(Marangu Gate·해발 1950m)가 대표적이다. 동봉 스님은 그 곳에서 1.2km 떨어진 작은 마을 마라외(Marawe)에 터를 잡았다. 

나무 아래 앉았다. 이방인의 명상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그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전했다. 탄자니아 고유 언어인 스와힐리어로는 ‘미미 나니(Mimi Nani)’다. 10여명이 앉더니 어느 새 100여명이 명상에 들었다. 한국어 발음이 적힌 ‘한글 반야심경’도 전했다. 하여, 명상에 들기 직전이면 어김없이 킬리만자로 기슭에 ‘... 모든 법은 공한 모습 생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며 더럽지도 아니하고 깨끗하지도 아니하며 늘어나지도 아니하고 줄어들지도 않느니라...’가 울려 퍼졌더랬다. 이 땅에도 법음이 전파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던 건 그때다. 

‘우리 절’ 지원 속에 1억원을 들여 3에이커 규모의 땅을 매입(2006. 2) 했고, 이어서 법인 ‘보리가람 스쿨’도 세웠다. 한국에 잠깐 돌아와서는 ‘킬리만자로 문화센터 건립과 평화통일 염원 101일 국토 고행정진 대장정’에 올랐다.(2006.11.30.∼2007.3.10.) 인연이 닿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이 2억원을 지원했다. 그 덕에 동봉 스님은 다르에스살람 키캄보니 무와송가의 땅 30에이커를 매입했다.(2008.8) 5년 후 그 땅을 조계종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에 기증했다.(2013.4)
 

학교건립에 나서려 했지만 말라리아 구호에 전념하느라 건립불사가 미뤄졌고, 개인보다는 종단 차원에서 지원해야 올곧은 학교가 세워질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탄자니아 학교 건립 지원 모금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서화전, 바자회, 후원의 밤, ‘드림 아프리카 저금통 캠페인’ 등의 모금활동을 통해 모연된 기금 30여억원을 투입,  키캄보니(Kigamboni)에 ‘보리가람 농업기술대학’을 세웠다.(2016.9) 1996년까지 탄자니아의 수도였던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은 지금도 정부기관과 주요시설 대다수가 그 곳에 자리하고 있다. 키캄보니는 다르에스살람 근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신도시로 확정 돼 ‘꿈의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절이 아닌 학교인가? 동봉 스님이 주지로 있는 서울 종로 대각사로 향했다. 

대각사는 3·1운동 민족대표이자 한국불교의 생활화·지성화·대중화를 주도했던 대선사 용성(1864~1940) 스님이 세운 사찰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재판 받는 법정에서도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라고 일갈했던 스님은 출옥 후 ‘화엄경’ 80권을 한글로 번역했는데 이는 불경 국역 사업의 신호탄이었다. 어린이 포교, 일요학교 설립, 시민선방 개설 등 선의 대중화에도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용성 스님의 유지를 올곧이 품고 전하는 사찰이 대각사다. 동봉 스님은 2017년 11월 대각사 주지로 취임했다.

“고(故) 이태석 신부님과의 인연에서 시작됐습니다.”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톤즈(Tonj)’라는 마을에서 한센병(나병·Leprosy) 환자를 돌보았던 이태석 신부는 지금도 ‘수단의 슈바이처’로 추앙받고 있다. 이태석 신부의 청으로 케냐 나이로비(Nairobi)에서 만났다.

“동봉 스님은 탄자니아서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명상을 지도하고 있었으니 수행센터 건립불사를 얘기했음 직한데 아니다.

“학교를 세우려 합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예수님과 부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교회·사찰보다는 학교를 먼저 세우실 것이라 믿습니다.”

수단에 학교를 건립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이태석 신부는 동봉 스님과 함께 탄자니아로 건너 와 학교 부지를 살피는데 힘을 보탰다고 한다. 

“아마도, 학교를 향한 저의 열망이 은연 중 표출된 게 아닐까 합니다.”
 

동봉 스님의 은사 고암(오른쪽) 스님은 성철 스님과도 인연이 깊었다.

동봉 스님은 강원도 횡성 갑천에서 태어났다.(1953) 동봉 스님의 비유 그대로 ‘칡넝쿨로 산등성이를 이을’ 정도의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다. ‘천자문’ ‘동몽선습’ ‘계몽편’을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동네 서당에서 뗐으니 한글을 알기도 전에 한문을 깨우친 셈이다. 가난했기에 9살에 입학했는데 그마저도 4학년으로 끝내야 했다. 열다섯 살(1968)에 ‘명심보감’을 통째로 암기하자 유학을 지도했던 선생은 “땅 속에 묻혀 있는 옥이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며 옥은(玉隱)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그 즈음 ‘논어’ ‘맹자’ ‘소학’ ‘자치통감’ ‘오언당음’ ‘칠언당음’을 다 보았다. 

‘개천의 용’이 되어 보려 3년 동안 사법고시를 공부했으나 낙방했다. 허한 마음을 추슬러 충북 제천으로 발길을 돌려 1년 동안 머슴살이(1974) 했다. 새경으로 받은 건 쌀 여섯 가마니. 돈 10만원으로 바꿔 경기도 양평에 작은 밭뙈기와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아랫마을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다 길에서 스님을 만났다. 합장을 올렸다. 

동봉 스님의 속가 이모는 치악산 구룡사의 대보살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모 집 벽장 속에는 ‘법화경’ ‘유마경’ ‘팔상록’ 등의 다양한 불교서적이 꽂혀 있었는데, 지식에 목말랐던 청년은 모조리 읽어버렸다. 

“자넨 중이 될 상이야!” “중이 안 되면요?” “주어진 삶을 다 살진 못할게야!” “출가하면 공부할 수 있나요?” “그럼. 매일 공부하지!”

꽃망울 터지는 이른 봄 구룡사로 들어가 삭발(1975)했다. 등산객과 참배객의 발길이 잦아 해우소 청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해야 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임했다. 도량 내 잣나무 심고 가꾸는 일도 행자 몫이었으니 수령 40년 잣나무는 거의 다 동봉 스님의 손길이 닿은 나무들이다. 사흘 밤낮을 한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염불삼매에 들만큼 정진의 힘은 남달랐다. ‘큰 산에 거목이 서 있다’고 했다. 절에서 만난 선배·도반의 권유로 그해 가을 해인총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계종 종정과 해인총림 방장이었던 용탑선원 조실 고암 스님 앞에 앉았다. 

“구룡사에서 행자 생활을 했다고! 한문도 꽤 밝다고 들었네. 용성 큰스님의 사리탑비문을 읽을 수 있겠나? 사흘 후에 보자고.”

사흘 뒤 번역한 비문을 들고 고암 스님을 뵈었다. 고암 스님은 용성 스님의 오도송을 짚었다. 

‘금오산에는 천년의 달빛 어리고/ 낙동강에는 만 리의 물결 일렁이네/ 고기잡이 배여! 어디메로 갔는가?/ 묵은 갈대꽃만 바람에 흔들릴 뿐.’       
“‘묵은 갈대꽃만 바람에 흔들릴 뿐’이라!’ 용성 스님도 그리 말씀 하셨는데 딱 맞았네.”

고암 스님은 그 자리에서 정휴(正休)라는 법명을 내렸다. 동봉(東峰)은 은사스님이 내린 법호다. 3년 후 고암 스님은 옛 조계종 총무원 청사 5층의 종정실에서 동봉 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렸다.(1979.3)

‘우뚝솟은 동봉에는 맑은바람 둘러있고(동봉대청풍·東峰大淸風)/ 잔잔해라 서강물은 밝은달을 머금었네(서강함명월(西江含明月)/ 이들주인 누구냐고 입을열어 묻지말게(莫問誰是主)/ 예로부터 영원토록 본디객이 없었나니.(자고영무객(自古永無客)’   

지식·진리 열정이 그 누구보다 뜨거웠던 청년이었으나 가난 앞에 푸른 꿈을 접어야 했던 사람. 탄자니아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을 터다. 조계종이 세운 건 ‘보리가람 농업기술대학’이다. 법인명의 ‘보리가람’을 학교 이름 앞에 내세운 건 동봉 스님의 뜻을 헤아려 잇겠다는 무언의 의지일 것이다.    
 

동봉 스님은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52개월을 머무르며 말라리아 구제활동을 펼쳤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이 탄자니아도 식량부족 국가입니다. 탄자니아의 정치·경제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건 교육뿐입니다. 조계종이 세운 학교는 탄자니아의 미래를 담보할 전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학교라는 이름의 공간이지만 부처님의 법음이 시작되는 도량이기도 합니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 ‘아름다운 동행’에 감사드립니다.”

동봉 스님의 말라리아 구제활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교육과정을 온전히 마친 건 해인사 승가대학이 유일한 동봉 스님이지만 최근까지 62권의 책을 선보였다. 초기·대승경전은 물론 천체물리·양자역학·생물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 세계까지 넘나들며 설파해 가는 강설이 일품이다. 내·외전을 가리지 않고 독파해 가는 동봉 스님의 ‘무서운 독서력’에 기인한다. 특히 어려서부터 다져 온 출중한 한문 독해력으로 경전 새겨가는 속도는 실로 엄청나다는 전언이다. 

“남들 경전 한 번 볼 시간에 두 번 볼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속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깨달은 안목으로 헤아려야 부처님 법을 올곧이 전할 수 있다고 보면, 저 역시 번역 한 줄도 무거운 일입니다.”

고암 스님은 자신이 보던 통현장자의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동봉 스님에게 전했다. 

지난해 12월 ‘화엄경’의 정수가 담긴 ‘법성게’를 내놓았다. 동봉 스님에게 화엄은 각별하다. 고암 스님이 자신이 보던 통현장자의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동봉 스님에게 전했기 때문이다.(1979.3.5) 화엄 바다에서 건져낸 보물 하나를 보여 달라 부탁 드렸다.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소’에 나타난 이문(二門), 즉 진여·생멸은 ‘화엄경’의 이(理)·사(事)와 연관 있습니다. 사(事)가 현상세계를 말한다고 보면 이(理)는 법(法), 즉 그 현상을 성립시키는  본체입니다. 원효 스님은 ‘진여 두 문이 서로 융통하여 한계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각기 일체 이사(理事)의 모든 법을 통섭한다’며 ‘두 문은 서로 여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화엄경에서도 ‘본체와 현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걸림 없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며 이사무애(理事無礙)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두 문맥이 맞닿아 있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파도가 생멸이고 사(事)라면 바다는 진여이며 이(理)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바다가 파도이고, 파도가 바다라는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

“다만, 이 도리는 깨달은 사람, 혹은 정각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각자(覺者)만이 현실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대각사 신도님들에게 일단 파도, 즉 사(事)에 초점을 맞추라 합니다. 현실·현상·지금에 방점을 찍는 겁니다. 욕심을 버려라!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삶에서 욕심이 아예 없다면 공동체는커녕 제 어깨에 올려 진 삶의 무게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불자라면 자신에게만 치중할 수 있는 욕심을 최대한 선심·공심으로 돌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정토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모두 나쁜 게 아니다.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이다. 번뇌조차도 버리려고만 하지 말고 정각으로 돌리라는 일언과 맥을 같이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하는 ‘기포의 새벽편지’는 2019년 2월22일로 1500회를 맞이했다.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부탁드렸다.

“제 앞에 앉아 있는 당신이 부처입니다!” 

킬리만자로 수행여정에서 명징하게 확신한 일언임에 분명하다. 아프리카 최초의 전법승 동봉 스님이 품어온 저 법에 의해 서울 대각사는 설산보다 더 빛나는 산으로 우뚝 설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동봉 스님은

- 1953년 강원도 횡성 출생.
- 1975년 출가. 은사는 고암 스님. 해인사승가대학 졸업.
- 1993∼1997년 BBS ‘살며 생각하며’ ‘자비의 전화’ 진행
- ‘학교법인 ‘보리가람 스쿨’ 설립. 조계종 ‘아름다운 동행’에 아프리카 땅 약 30에이커 기증(보리가람농업기술학대학교 개교), 저서로는 ‘사바세계로 온 부처님의 편지’ ‘마음을 비우게 자네가 부처야’ ‘아미타경을 읽는 즐거움’ 등 현재까지 62권을 선보였다.  

 

[1479 / 2019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