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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시간의 문

기자명 임연숙

여전히 남은 과거, 현재와 이어지다

오래된 주택 활용한 예술공간
낡은 벽·기둥을 장식한 사군자
곳곳에 남겨진 수많은 균열들
다른 세상 연결된 문처럼 전달

조은령 作 ‘시간의 문’, 트레싱지에 펜, 장지에 먹, 공간 설치, 2018년.
조은령 作 ‘시간의 문’, 트레싱지에 펜, 장지에 먹, 공간 설치, 2018년.

한양 성곽길 3코스를 따라 오르다 보면 고갯마루쯤 되는 곳에 중구청 소속의 문화공간 ‘THE 3rd PLACE’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전시와 모임, 예술교육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마주한 조은령의 작품은 공간에서 영감받아 공간 속에 자신의 작품을 조용하고도 잔잔하게 녹여내고 있다. 오랫동안 동양미술의 화제였던 사군자를 주제로 오래된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에 조화롭게 사군자의 정신을 돌아보게 한다. 조은령의 작품에서 두 가지 놓치지 말아야하는 감상포인트는 현대적이고 화려한 도시에 존재하는 오래된 주택의 옛 기억에 대한 상상과 체험이라는 측면과 문인화의 주제인 사군자의 새로운 접근과 해석이다. 

60~70년대에 지어져 숱한 사람이 부대끼고 살았을 것만 같은 집,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 보이는 도심 성곽길 옆 이 집은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개로 나뉜 작은 생활공간의 흔적, 이를테면 연탄을 놓았던 자국 같은 것들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작가는 이 집에서 도연명의 ‘귀거래혜(歸去來兮)’를 떠올린다. 관직을 벗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마음을 노래한 도연명의 시를 연상하는 것은 집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 어떤 관계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歸去來兮 도연명(陶淵明)은 지쳤다. 달려온 지난 모든 날들이 잘못되었으니 돌아가는 것만이 바른 결정이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간의 흐름 속에 돌아온 고향은 기억 속에 그곳이 아니었다. 뜰은 황폐해졌지만 잡초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소나무와 국화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었다. 그 안도함 속에 전원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돌아가려 했던 것은 고향이었을까? 그가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어긋나기 전의 자신이다. 도연명에게 소나무와 국화는 ‘시간의 문’이다.”(작가의 작업노트 발췌)

작가는 난초, 대나무, 잡초 풀과 같은 것들을 장지 위에 먹, 트레싱지에 펜등으로 표현하였다. 사군자나 문인화라는 개념을 현대 작품에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문인화 주제들은 그저 낡은 옛 그림처럼 느끼게 만든다. 시각적으로 이해하기엔 현대 이미지 홍수 속에서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은령 작가는 이를 공간 속에 설치미술적인 요소를 더해 옛사람들이 옆에 두고 즐겼던, 또, 식물을 통해 자신을 수양하던 것처럼 난과 대나무를 배치했다. 낡은 벽면에는 다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문이 그려져 있다. 작은 벽의 균열은 마치 균열 틈에 다른 어떤 세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열어두게 한다. 

작가는 과거와 연결된 문과 이 틈을 통해 타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서로에 대한 인정을 위해서는 틈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얇고 하늘거리는 재질의 바탕 위에 드로잉 된 그림으로 작가가 말하는 시간의 문을 통한 과거와 현재의 공기를 오묘하게 섞어 놓는다. 

봄이 되면 매화에서 팍팍했던 겨울의 무거움과 힘듦을 잊고 새로운 희망을 느끼고 그래서 또 새로운 해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고 난초를 곁에 두고 그 질긴 생명력과 꽃의 유려함에서 마음결을 가다듬기도 하고, 문풍지 밖으로 사각거리는 달빛에 비친 대나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처럼 낯선 집에서 그러한 옛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그러나 우리 시대와도 어울리는 작품들을 만나보았다.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예술교육 팀장 curator@sejongpac.or.kr

 

[1480 / 2019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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