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 14대 총무원장 서리 혜정 스님-상

종정·종회 갈등에 경덕 스님 이어 총무원장 서리에 그친 두 번째 스님

1952년 금오 스님 은사로 출가
불교정화운동·통합종단서 역할
40세에 종회부의장 맡으며 두각
자운 스님에 이어 총무원장 임명
​​​​​​​
종헌개정안 두고 종단 내홍 심화
해인사 종회, 총무원장 임명무효
종정추대 취소 결의로  갈등 고조
서옹 스님, 중앙종회 해산 명령

1977년 6월28일 자운 스님의 사퇴 선언으로 조계종은 다시 총무원장 공백사태를 맞았다. 총무원장 중도사퇴는 서옹 스님이 종정에 취임한 이후 다섯 번째였다. 더 이상 세간으로부터 주목받을 뉴스도 아니었다. 그러나 수개월이 멀다하고 총무원장이 바뀌면서 종단 내부에서는 종정중심제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중앙종회를 중심으로 종헌개정 논의가 본격화됐고, 그럴수록 종정중심제를 고수하려는 서옹 스님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이런 가운데 서옹 스님은 7월23일 혜정 스님을 제14대 총무원장 서리로 임명했다. 혜정 스님은 당시 중앙종회 부의장으로 종정스님에 우호적인 스님으로 분류됐다. 종단 내에서 특별히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는 스님들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혜정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서옹 스님이 결과적으로 중앙종회로부터 불신임되는 빌미가 됐다. 당시 종무원법에는 총무원장 자격 기준을 세납 45세, 법랍 25년 이상으로 했지만 혜정 스님은 1933년생으로 44세에 불과했다. 기본적인 종법조차 확인하지 않고 단행한 인사였다. 종회 부의장까지 역임한 스님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총무원장 자격요건은 갖췄을 것’이라는 안일한 판단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혜정 스님이 출가 이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종단의 주요소임을 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혜정 스님은 1933년 7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우연한 기회에 ‘불교’잡지를 접하면서 불교에 심취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옛 스님들의 일화는 혜정 스님이 발심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마곡사는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 잠시 출가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 그러나 당시 마곡사는 결혼한 스님들이 운영했던 사찰로 비구승들이 수행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었던 스님들도 비구승이 절에 오는 것을 마뜩치 않아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스님은 떠밀리듯 비구승들이 중심이 된 수덕사 대원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첫 출가사찰이었던 공주 마곡사에서의 아픈 기억은 혜정 스님이 훗날 불교정화운동에 나서고, 율사로서의 삶을 살게 한 배경이 됐다. 수덕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1952년 8월 그곳에 주석하던 금오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 무렵 불교계에서는 효봉‧금오‧청담 스님 등을 중심으로 정화운동이 본격화됐다. 1954년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려대회가 열리자 혜정 스님은 은사를 따라 참가했다. 조계사에서 “대처승은 사찰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며 단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1957년 불교정화운동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혜정 스님은 수행의 길에 올랐다. 불국사 선방을 시작으로 법주사, 해인사, 봉암사, 수덕사 등에서 안거를 진행했으며, 월출산 도갑사 폐사지에서 홀로 토굴을 짓고 3년간 용맹정진을 했다.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하고 그해 8월 중앙종회가 개원하자 혜정 스님은 초대 중앙종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1966년 2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된 이후 1973년 1월 3대 중앙종회에서 40세의 나이에 차석부의장에, 1974년 9월 4대 중앙종회에서는 수석부의장에 선출됐다. 중앙감찰원 감찰부장, 동국대 감사를 거쳐 1976년 10월 법주사 주지에도 임명되면서 종무행정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랬기에 서옹 스님이 혜정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지명하는 데 특별한 하자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었다. 

이 무렵 종헌개정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서옹 스님 측도 심상치 않은 여론을 감안한 듯 기자회견을 열어 종헌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대한불교(1977년 8월28일자)’에 따르면 서옹 스님은 8월23일 기자회견을 열어 “율장을 바탕으로 한 종헌종법 개정을 통해 자율적인 운영체계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현행 종헌은 해방 이후 국가체제에 따라 삼권분립 제도를 골자로 제정되면서 불합리하고 미비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서옹 스님은 원로중진, 종회, 신행단체 대표 등이 참여하는 ‘종헌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수행과 포교에 중점을 둔 종헌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서옹 스님의 종헌개정 계획에는 중앙종회가 요구한 ‘종정중심제’ 개편 내용이 빠져 있었다. 오히려 종헌의 ‘삼권분립’체제를 문제 삼으며 종헌개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종정중심제를 한층 강화하겠다는 의미였다. 중앙종회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월주‧설조 스님 등은 종회의원 33명의 연명을 받아 9월9~10일 제48회 임시회를 소집했다. 임시회 안건은 △총무원장·규정원장 인준 △종정의 총무처리 타당성 여부 △종헌종법 개정안 △기타사항이었다. 중앙종회 차원에서 ‘총무원장 중심제’로의 종헌개정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종정중심제를 고수하려는 종정스님 측에서는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서옹 스님 측은 “종단화합에 저해된다”며 48회 임시회를 유회시키겠다는 계획에 착수했다. 종회의원을 겸직하고 있는 집행부 측 의원들의 불참을 유도하고, 물리력을 동원해 일부 종회의원을 감금했다. 결국 9월9일 서울 중앙불교회관에서 열린 48회 임시회는 재적의원 47명 가운데 23명이 참석, 과반수에 1명이 모자라 유회됐다. 종정스님 측의 강압적인 유회작전으로 종회 개원이 무산되자 중앙종회는 더욱 강경해졌다. 이런 가운데 서옹 스님은 지난 종회에서 종헌개정을 강하게 주장했던 대구 동화사 주지 서운 스님을 전격 경질했다. 이는 종단 집행부에 반발하고 있는 중앙종회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종정스님 측과 중앙종회의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1977년 7월 총무원장으로 임명된 혜정 스님(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은  종정 서옹 스님 등 집행부스님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불교신문 제공

중앙종회의원들은 다시 종회 소집에 착수했다. 10월7일 49회 임시회를 열어 ‘종정이 시행한 종무처리 무효 결의’ ‘서옹 종정추대결의 무효’ 등을 다루기로 했다. 집행부 측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회의장소도 서울이 아닌 해인사에서 열기로 했다. 그러자 이를 미리 파악한 서옹 스님 측은 중앙종회 소집 공고일 보다 하루 앞선 9월23일 종령 36호를 공포하고 “천재지변이 없는 한 중앙종회 회의는 서울 견지동 45번지(조계사) 외에서는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해인사 종회가 성원되더라도 종정이 공포한 종령에 위배돼 무효라는 주장을 펼칠 계산이었다. 

중앙종회는 49회 임시회를 강행했다. ‘4대 중앙종회 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임시회에는 24명이 참석했다. 중앙종회의원 도우 스님이 9월30일 규정원장 서리로 임명되면서 재적의원은 46명으로 줄었다. 이에 따라 49회 임시회는 재적의원의 과반수를 넘겨 성원이 됐다. 

중앙종회는 첫 안건으로 종정스님이 공포한 종령 36호 폐기의 건을 다루고 “종헌종법의 절차에 따라 소집된 종회를 하위법인 종령에 의해 무효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며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중앙종회는 종정추대의 절차를 명문화한 ‘종정추대조례’도 개정하고 “종정이 중대한 과오가 있을 시 중앙종회의원 재적 과반수의 결의로 추대결의를 취소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뒤이어 논의될 종정추대결의 취소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중앙종회는 ‘종정이 시행한 종무처리 무효결의의 건’도 상정했다. 종정스님이 임명한 총무원장·규정원장과 동화사 주지 서운 스님을 대기발령한 종무처리를 무효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양우 스님은 제안 설명을 통해 “총무원장으로 임명된 혜정 스님은 연령 44세이고, 법랍도 미달된다. 규정원장 서리 도우 스님은 ‘해인사 종회는 묵과할 수 없다’는 망언을 했다”며 “이런 두 사람을 발령함으로써 종단을 혼란케 하고 있어 이에 대한 무효결의안을 정식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의장 녹원 스님은 “한 살 부족쯤은 양해하면 안 되겠느냐”는 개인의견을 제시했지만 “종회의 결의가 종법을 능가할 수 없다”는 종회의원들의 반발에 막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중앙종회는 종정스님이 임명한 총무원장·규정원장에 대한 인사를 모두 무효로 결의했다. 이로써 혜정 스님은 12대 총무원장 서리 경덕 스님에 이어 중앙종회에서 인준이 거부되는 두 번째 총무원장으로 기록됐다. 중앙종회는 동화사 주지 대기발령 및 신임주지 임명의 건도 모두 무효로 결의했다. 

중앙종회는 다시 종정추대결의 취소결의안도 상정했다. 안건이 상정되자 종회의원들은 종정스님을 겨냥해 노골적인 불만들을 쏟아냈다. 양우 스님은 “종정스님이 취임한 후 3년간 양 원장(총무·규정원장)을 12명, 부장을 24명 교체하는 무능 무정견을 보였고, 부당한 인사 처리로 자파세력 부식에만 급급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설조 스님은 “국가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분을 종단의 대표로 모시기에 부적당하다”고 했고, 월주 스님도 “옛날 선방에서 수도하던 석호 스님(서옹 스님 옛 법명)은 간 곳 없고, 권력에만 집착해 날이 갈수록 실수만 저지르고 있다”고 날선 발언들을 이어갔다. 의장 녹원 스님과 부의장 광덕 스님이 “감정적으로 처리할 사항이 아니니 심사숙고해서 종정추대취소 결의안은 차기 회의에서 논의하자”고 만류에 나섰지만, 종회의원들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서운 스님은 “(종정스님이) 또 무슨 종령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하루빨리 취소결의를 하고, 직무집행가처분을 신청해서 개 쫓듯 내몰아야 한다”고 거친 발언을 쏟아냈다. 결국 이날 종정추대 취소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중앙종회의 종정추대 취소결의는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종정스님과 총무원장 혜정 스님 등 종단집행부는 10월10일 즉각 성명을 내고 “해인사 종회는 종령에 위배되는 불법집회”라며 “해인사 결의는 이성을 상실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하루 앞선 10월9일 성수·우룡·법달 스님 등 300여명의 수좌스님들은 서울 화계사에서 전국수좌대회를 열어 “시시비비를 일삼는 중앙종회는 즉각 해산하라”고 촉구했다. 총무원은 11월3일 전국교구본사주지회의를 열어 해인사 종회가 무효임을 재확인하며 중앙종회를 압박했다. 

중앙종회는 11월9일 ‘종정직위해임 확인청구소송’을 제기하며 법정다툼을 시작했다. 그러자 종정 서옹 스님은 11월11일 비상종령 37호를 공포하고 “중앙종회는 본분을 망각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 자행한다”면서 ‘11월11일부로 중앙종회 해산’을 명령했다. 이로써 조계종은 깊은 내홍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81호 / 2019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