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9.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⑲ 진흥왕의 순수비와 황룡사의 장육존상-상

기자명 최병헌

진흥왕 3번째 연호 ‘대창’(大昌)은 유교적 왕도사상과 이상적 제왕상 과시

진흥왕 재위 37년 동안
4번에 걸쳐서 연호 변경

연호에는 시대정신 담겨
대창은 왕의 전성기 의미

함경도까지 순수비 세우고
새로 편입된 백성들을 위무

태왕·짐 용어 담긴 순수비
생전에 왕 중 왕으로 불려

​​​​​​​승려, 관료 넘어 특별대우
이후 전륜성왕 염원 단초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은 3번째 연호인 대창 사용 기간에 확장된 영토지역을 돌며 3개의 순수비를 남겼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은 3번째 연호인 대창 사용 기간에 확장된 영토지역을 돌며 3개의 순수비를 남겼다.

제24대 진흥왕대(540〜576)는 왕권강화와 영역확장의 사업을 적극 추진하여 삼국시기 신라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진흥왕은 재위 37년 동안 건원(建元)·개국(開國)·대창(大昌, 또는 太昌)·홍제(鴻濟) 등 연호를 4번 바꾸었는데, 한 국왕의 재위 기간 이렇게 잦은 연호 변경은 드문 일이다. 첫 번째 건원은 처음으로 연호를 세운다는 의미로서 앞서 법흥왕 23년(536)에 제정된 연호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개국은 새로 나라를 연다는 의미로서 커다란 정치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대창은 국가가 크게 창성한다는 의미로서 전성기에 들어섰음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네 번째 홍제는 널리 제도한다는 의미로서 불교적인 영향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로써 각각의 연호는 단순한 연대표기의 변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각 시기에 추구되던 시대정신과 국가의 이상을 표방해주는 것이며, 실제적인 정치적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진흥왕의 재위기간은 연호의 변경에 따라 4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왕권위상 변화와 영역확장 등의 정치변동이 역동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제1기 건원 11년간(법흥왕 23년〜진흥왕 11년)은 7세 어린 나이로 즉위한 진흥왕이 법흥왕의 딸이자 모후인 지소태후(只召太后)의 섭정을 받으며 법흥왕 정책을 그대로 계승했던 시기이다. 내적으로는 법흥왕이 시작한 흥륜사를 준공하고 국사를 편찬하여 왕권의 정통성 확립과 위상 강화를 추진하였다. 외적으로는 나제동맹을 지속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군사조직을 정비하여 뒷날의 대외팽창을 준비하였다. 다음 제2기 개국 17년간(진흥왕 12〜28년)은 진흥왕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시기이다. 옛 백제의 한강유역과 가야의 낙동강 서쪽 지역을 영유하고, 고구려의 혜량을 받아들여 승관제를 정비하고 황룡사를 창건함으로써 흥륜사를 대신하여 국가불교의 중심도량을 삼았다. 그리고 중국 남북 양조의 국가들과 활발히 교류함으로써 이전시기 백제와 남조 양나라와의 교류에 그쳤던 일방적 외교의 한계를 벗어나 중국의 선진문화를 직접 수입하고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 

그 다음 제3기 대창 4년간(진흥왕 29〜32년)은 한강 유역에 남천주(南川州, 주치는 利川),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남쪽 지역에 달홀주(達忽州, 주치는 高城)를 설치하여 국경지역을 안정시키고, 진흥왕이 직접 순행하여 유교의 이상적 제왕상과 신민에 대한 새로운 윤리관을 제시하는 포고령 성격의 순수비를 수립하였다. 마지막 제4기 홍제 5년간(진흥왕 33〜37년)은 불교적인 이상적 제왕인 전륜성왕의 출현을 염원하여 황룡사의 장육존상을 조성하고, 미륵불의 화신으로 받들어진 화랑을 중심으로 하는 청소년조직을 정비하였다. 결국 제3기와 제4기는 제2기의 영역확장에 성공한 구체적 성과를 토대로 하여 사상적으로 정복군주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시책을 강구하였던 시기였는데, 제3기는 진흥왕 순수비의 수립, 제4기는 황룡사 장육존상의 조성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진흥왕 순수비는 유교적인 왕도사상과 이상적 제왕상, 황룡사 장육존상은 불교적인 이상적 제왕인 전륜성왕을 염원하여 두 시기의 사상정책이 유교와 불교의 대조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진흥왕의 유교적 정치사상을 집약적으로 전해주는 자료는 ‘진흥왕 순수비’이다. 진흥왕은 새로 영유한 국경지역을 순수(巡狩)하면서 여러 곳에 그 취지를 새긴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창령비(昌寧碑)·북한산비(北漢山碑)·황초령비(黃草嶺碑)·마운령비(磨雲嶺碑) 등 4개이다. 이 가운데 창령비를 제외한 나머지 3비의 서두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순수비로 보는 반면, 창령비는 “순수관경”이라는 명기가 없어 “척경비(拓境碑)”로 구분된다. 순수3비는 대창으로 연호를 변경한 때인 진흥왕 29년(568)에 수립된 것인데, 그 비석의 위치로 보아 당시 신라의 동북쪽의 영역이 함경남도의 함흥(咸興)과 이원(利原)에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순수3비는 비문의 구성과 내용이 기본적으로 동일한데, 특히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비문의 구조와 내용이 동일하고, 왕을 수행한 인물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마운령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비석은 앞면(陽面)과 뒷면(陰面)으로 구성되었다. 앞면의 비문은 세 부문으로 나눠지는데, 첫째 제1행 제1자에서 제2행 제2자까지의 제기(題記) 부분 28자, 둘째 제3행 제1자에서 제9행 제7자까지의 기사(紀事) 부분 163자, 셋째 제10행 제1자에서 제25자까지의 회가(廻駕) 부분 25자로 되어 있으며, 뒷면의 비문은 수가인명열기(隨駕人名列記) 부분 199자로 구성되어 있다. 비문 내용 가운데서 순수의 당위성과 비석 수립의 취지를 기록한 제기 부분과 기사 부분을 단락을 나누어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태창(太昌) 원년 세차(歲次) 무자(戊子) 8월21일 계미(癸未) 진흥태왕이 관경(管境)을 순수하고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2) 대저 순풍(純風)이 일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참됨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邪惡)한 것이 서로 경쟁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제왕(帝王)이 연호(年號)를 세움에 자신의 몸을 닦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러나 짐(朕)은 역수(歷數)가 몸에 이르러 위로는 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하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가 두렵다. 또한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運數)를 열어 보여주며, 명명한 가운데 신지(神祗)에 감응되어 부명(符命)에 응하고 셈대에 부합하였다. 
(4)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사(和使)가 서로 통하여 오도다. 아래로 스스로 신민(新民)과 구민(舊民)을 무육(撫育)하였으나, 오히려 말하기를 왕도(王道)의 덕화(德化)가 고루 미치지 아니하고 은혜가 두루 베풀어지지 아니한다고 한다. 
(5) 이에 무자년(戊子年, 진흥왕 29년) 가을 8월에 관경을 순수하여 민심을 살펴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 재난의 기미(機微)를 살피고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적이 있는 무리에게는 벼슬과 물건을 상으로 더하여 주어 공훈(功勳)을 표창하려고 한다. 

이상 비문 가운데 먼저 제목에서 진흥왕 29년(568)에 순수하여 기록한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주목되는 사실은 태창이라는 연호와 진흥태왕이라는 왕호이다. 특히 진흥태왕은 시호가 아니고 생전에 사용한 왕호였으며, 왕을 수행한 관료들의 이름 앞에는 예외없이 소속 부명을 밝히고 있는데 반하여 진흥왕은 소속 부명을 붙이지 않고 큰 왕, 또는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의 대왕(태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리고 순수는 ‘예기(禮記)’에 의하면 원래 제왕이 왕경을 떠나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를 모아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예악의 제도를 바로 잡는 등을 실행하는 것인데, 진흥왕의 순수도 이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순수비의 수립 장소로서 북한산의 비봉·황초령·마운령 등 높은 산 위를 택했던 것은 산천이나 하늘에 대한 제사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다음 기사 부분에서는 포고령을 내린 주체인 진흥왕으로서 먼저 제왕의 연호 세우는 뜻이 자신의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데 있음을 ‘논어(論語)’를 인용하여 천명하고 있는데, 대창으로 연호를 고치고 순수에 나서게 된 이유와 당위성을 밝힌 것이다. 원래 유교적인 전통에 의하면 연호는 황제만이 세울 수 있는 것이며, 다음 구절에 나오는 ‘짐(朕)’이라는 용어도 황제만이 자칭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진시황제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순수비를 세우기 7년 앞선 진흥왕 22년(561)에 세운 창령척경비에서 ‘과인(寡人)은 어려서 왕위에 올라 정사를 보필하는 신하에게 맡겼다’라고 하여 과인이라는 겸칭(謙稱)을 사용했던 것에 비하면 진흥왕의 위상이 제후에서 황제로 크게 격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 태조로부터 왕통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서경(書經)’의 왕도사상을 구현하는 제왕으로서의 위상을 과시하였다. 진흥왕은 그러한 제왕의 권위로 영역을 개척하고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여 새로 복속된 지역의 백성을 원래의 신라인과 같이 무육(撫育)하려고 하였으나, 왕도의 덕화가 고르게 미치지 못하다는 평가를 의식, 지방을 순수하여 민심을 채방(採訪)한다고 하여 순수의 취지를 밝히었다. 새로 복속된 지역의 주민을 원래의 신라인과 같이 무육하였다는 것은 앞서 법흥왕 11년(524)의 ‘울진봉평비’에서 새로 편입된 지역의 주민을 노인(奴人)이라 하여 구별하였던 것에 비하면 주민통합의 면에서 커다란 정치사상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론에서 충성과 신의, 재주와 용기 등으로 국가에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벼슬과 상품으로 표창할 방침을 밝히는 것으로 마감하였다. 진흥왕이 제시한 충성(忠)·신의(信)·용기(勇) 등의 윤리덕목은 화랑도의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의 핵심적인 덕목이 되는 것이다. 진평왕 22년(600) 원광(圓光)이 귀국한 직후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라는 젊은이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세속오계 같은 윤리덕목은 이미 진흥왕대부터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운령순수비의 뒷면에는 왕을 수행한 신료들의 이름을 열기하였는데, 주목되는 점은 제일 앞에 사문도인(沙門道人)으로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을 들고, 다음 대등(大等) 이하의 관직을 가진 일반 신료들과 구별되게 한 칸 공백을 두고 기록한 것이다. 이는 승려들이 일반 관료보다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일반 관료들은 ‘관직+소속부+이름+관등’의 순으로 예외 없이 이름 앞에 소속부의 이름을 붙이고 있었던데 반하여 소속부를 붙이지 않고 있었다. 이는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6부 체제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지위를 갖게 된 존재로서 국왕과 함께 불교 승려의 존재를 주목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부족의식을 극복하고 국가정신을 수립하는데 불교 승려가 담당했던 지도적 역할을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81호 / 2019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