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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불교 핵심은 윤회가 아니라 연기다”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9.03.21 16:26
  • 수정 2019.03.25 14:27
  • 호수 1482
  • 댓글 25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가 3월21일 법보신문에 윤회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주제로 한 기고문을 보내왔다. 정 교수는 “무아와 모순되지 않은 것은 연기입니까, 윤회입니까?”라며 “불교계는 숙명적·억압적 윤회론 결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윤회와 반윤회’를 비롯한 ‘제도와 본성’ ‘철학의 21세기’ ‘중국관념사’ ‘예술, 인문학과 통하다’ 등 저서 및 공저가 있다. 법보신문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이 있으면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의 경계를 나타낸 육도윤회도.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의 경계를 나타낸 육도윤회도.

나의 ‘윤회와 반윤회-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2008)가 나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당초 목적은 21세기 모두에 있었던 ‘무아와 윤회의 충돌’에 관한 논쟁이야말로 한국철학의 모범적 논쟁으로 여겨 그것을 정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길어져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나에겐 간디(1869~1948)가 답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간디보다 스무 살 남짓 아래지만 신불교를 주창하고 1954년 50만의 불가촉천민과 불교도로 개종한 암베드카르(1891~1951)가 아직도 불평등이 판을 치는 인도사회의 해결책으로 보였다. 천민출신으로 초대 제헌의원이었지만 ‘나는 앉을 자리가 없다’면서 불가촉을 위한 배려를 강조한 그다. 인도를 가보라. 길 이름에 간디만큼이나 암베드카르도 많다. 그러나 인도의 신분제는 여전하다. 어째서 그럴까? 그리고 왜 암베드카르는 이슬람과 불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불교를 선택했을까? 불교의 어떤 면이 그에게 해결책으로 보였을까?

알다시피 인도에서 불교는 천민의 종교다. 자못 위태로운 발언 같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인도에서 불교는 천민이라야 믿는다. 불평등을 넘어서려는 알량한 몸짓인 것이다. 절도 많지 않지만, 인도의 사찰에서는 불상 옆에는 거의 검은 뿔테안경을 쓴 암베드카르의 사진이 놓여있다. 그는 천민의 부처인 것이다. 과연 암베드카르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고민을 붓다의 고민 가운데 하나로 감정이입해보면 좋지 않을까?

흔히 인도의 카스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신분이 아니고 직업이라고 말한다. 내가 미국에서 본 인도여학생도 수업시간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건 변명으로 들린다.

인도 사람들은 바르나(varṇā)와 자티(jāti)를 구별해서 말한다. 바르나는 천성을, 자티는 색깔을 뜻하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바르나가 아닌 자티로 여긴다. 내 천성은 수학적 머리에 있지만 내 직업은 모태신앙 때문에 목사일 수 있는 것과 같다. 흔히 말하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는 바르나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이 인도사회에서 이를 ‘직업(군)’에 따른 분류로 여기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인도인에게 카스트를 물으면 바르나가 아닌 자티로 대답한다.

자티는 출생과 더불어 주어지는 것으로 그 집(안)에 주어진 ‘일’이다. 뭄바이의 도비가트는 빨래 일을 하는 사람(또는 종족)이 양잿물 냄새 속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고, 강가강의 화장터에는 주검을 태우는 일을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같이 해야 하는 곳이다. 이를테면 ‘빨래꾼’, ‘화장꾼’은 4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카스트밖’(outcaste) 또는 ‘불가촉’(the untouchables)에게 주어진 자티인 것이다.

기억할 것은 인도에서 문제는 ‘카스트힌두’가 아니라 거기에 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엄청난 차별과 박해다. 마을의 우물도 못 떠먹고, 신발을 벗고야 동네에 들어오고, 침통을 목에 걸어야 하고, 도시로 나가 신분을 속였다가는 몰매 맞는.

나는 인도에서 3대 종교개혁운동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자이나교, 둘째는 불교, 셋째는 시크교다. 그런데 그들이 공통교리로 삼는 것이 바로 평등이다. 얼마나 불평등에 진저리가 났으면 종교조차 바꾸고자 하겠는가. 그들은 신분과 상관없이 더불어 밥을 먹는다.

카스트가 인도의 전통인 것을 어떡하랴는 물음에는 인도가 평등의 불교국가로 천년을 지낸 것을 떠올리라고 답하고 싶다. 비록 지금이야 부처가 비슈누의 화신이 되어버렸고 3억3000의 신들 속에서 ‘자연사’ 해버렸지만, 제발 애초 불교운동의 모습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래서 나는 ‘청년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불교에서 윤회를 받아들이면 자이나교와 너무도 비슷해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지역, 시기, 교리, 전통, 하다못해 불살생 이론조차 닮았다. 한국불교도들이 성지로 순례하는 녹야원의 한쪽이 곧 자이나의 성지다. 그리고 자이나의 사원에서도 108염주를 굴린다. 잊지 말길. 불교는 외견상으로는 힌두교를, 내용상으로는 자이나교를 닮고 있는데 여기서 불교의 특징은 바로 연기 사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그런데도 자꾸 연기보다 윤회를 말하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차라리 어느 방장스님처럼, “그럼 우리 뭐 먹고 사니?”라는 말씀을 건넨다면 차라리 좋겠다. 그러나 학계에서만큼은 불교의 핵심은 연기지 윤회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면 한다. 어느 불교계 인사에게라도 “불교의 핵심을 오직 한 단어로 연기와 윤회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과연 윤회라고 답할 사람이 있을까? 아닐 것이다. 물론 불교의 핵심은 “연기와 윤회를 넘어 무아지…”라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옳은 회답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묻자. “무아와 모순되지 않은 것은 연기입니까, 윤회입니까?”라고. 무아와 연기는 결코 불일치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연기와 윤회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우리 불교계가 가슴 아프다. 이렇게 나는 정리하고 싶다.

첫째, 불교의 핵심은 무아다. 그리고 무아설에 걸맞게 힌두교적 윤회 사상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것이 연기다. 윤회에는 전생과 내생에 걸쳐지는 그 무언가가 있어 무아와는 잘 맞지 않는다. 그러나 연기는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윤리적 업보이고, 선악의 응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윤회조차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인데, 굳이 부정적인 개념을 중심에 놓을 필요는 없다. 윤회는 벗어나야 할 그 무엇이고, 연기는 깨달아야 할 그 무엇이다. 이왕이면 공부할 것으로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초기경전에서조차 윤회가 나온다는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보다 앞서지 않는다. 윤회 사상은 힌두교의 전래사상으로 당연히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일반화되어 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그 공간에서 노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함경 등 초기경전에 윤회라는 말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곧 불교가 애초부터 윤회를 (적극적으로) 설법했다는 주장으로 나가는 것은 곤란하다.

넷째, 무아설이 불교의 제1의라고는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무아는 연기의 최종결론이다. 그러니까 연기설[緣起成空]은 불교의 최상위 명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 무아[諸法無我]나 무상[諸行無常]은 연기 없이 설명이 불가능하다. ‘왜 내가 없나?’의 해답이 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전생에도 내생에도 있다’는 윤회의 이론을 내세우는 것은 불교의 기본교리와 배치된다.

다섯째, 윤회와 무아의 모순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은 불교사에 걸쳐 엄청나게 많았다. 짐꾼인 푸드갈라, 상속(업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 또는 중유(이생과 내생 가운데 있음) 등등.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수천수만의 불교 가운데 우리가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다. 그런 불교의 이론들이 아무리 우리를 위로해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석존의 가르침, 다시 말해, ‘힌두교 결별’하고 ‘자이나교와 차별’되는 불교로 돌아가려고 애써야 한다.

여섯째, 윤회 사상은 인도에서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기제로 오늘날도 여전히 작동하는데, 불교도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가 된다. 잘못 적용되었다는 변명은 이론 자체에 맹점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만일 부처가 이 세상에 다시 내려와서, 불교도이면서도 신분제를 인정하고 평등을 위해 분투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종교에서는 초인적인 숭배의 대상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종교가 만들어낸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다.

청년 싯다르타가 논박한 바라문교 곧 힌두교의 문제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나를 규정짓고, 현생의 내가 내생의 나를 규정짓는다는 이 엄청난 질곡의 수레바퀴를 불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백정노릇을 하다 죽어 현생에서도 업보가 쌓이고, 나는 창녀의 딸로 태어나 창녀노릇을 하다 죽어 현생에서도 업보를 씻지 못했다면, 나는 내생에도 백정과 창녀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데, 이를 붓다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래서 불교에서 ‘무기업’(無記業) 이론이 탄생하는 것이다. 학술적으로는 불명확하고 돌출된 느낌을 주지만 ‘직업상으로 하던 일(skillful job)은 업을 짓지 않는다’는 선언이 주는 이 사회혁명적인 발언을 보라. 신분을 넘어 죄수를 죽이는 망나니도 해탈할 수 있는 종교가 불교다. 자이나교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입장에 따라 종파가 달라지지만, 또한 불교에서도 계율상 비구와 비구니 간의 약간의 차별은 보이지만, 분명히 여성의 해탈을 보장하는 종교가 불교다.

많은 학자들이 윤회에 대한 비판에 주저하는 까닭도 민중과 함께 오랫동안 받아들여지던 관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친숙함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한국불교계(전문가집단만이라도)에 말하고 싶다. 불교를 힌두교와 구별하고 계급을 타파하라고, 윤회를 부정하고 연기를 긍정하라고, 무신론을 확립하고 선학의 전통을 세우라고. 오늘날 ‘출신(出身)’이라는 말로 희석되어 일상적으로 표현되는 계급적 불평등이 종족(제3세계 노동자, 다문화가정), 학벌(고졸, 일류대학), 재산(금 수저, 흙 수저)과 관련된 지는 꽤나 오래되었다.

정세근 충북대 교수
정세근 충북대 교수

불교는 자아의 실체를 부정한다. 그것이 바로 무아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는 무자성(無自性: niḥsvabhāva)과 자성(自性: 부정사 niḥ를 뗀 svabhāva)을 불성(佛性)과 더불어 혼란스럽게 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불교가 ‘불성으로 쉽사리 오해되는’ 자성보다는 무자성에, ‘종교적이고 신화적이고 억압적이고 숙명적인’ 윤회보다는 ‘사실적이고 자연적이고 사회적이고 자발적인’ 연기 쪽에 더 무게를 두었으면 하는 다소곳한 바람이다. 아무리 그 바람이 바람으로 흩어질지라도.

[1482호 / 2019년 3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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